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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5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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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美 전쟁부, 장진호 전투 때 산화한 전쟁 영웅 75주기 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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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상륙작전도 참여했던 윈드리치 하사

    전우들 위해 자기희생… ‘명예훈장’ 추서

    지금으로부터 꼭 75년 전 함경남도 장진호 일대에선 미국 해병대와 중공군 간에 치열한 싸움이 한창이었다. 밤이면 기온이 영하 30∼40도까지 떨어지는 혹한 속에서 미군 병사들은 적군은 물론 강추위와도 사투를 벌여야 했다. 장진호 전투는 1918년 벨로 숲 전투(프랑스), 1945년 이오지마 전투(일본)와 더불어 미 해병대가 경험한 가장 처절한 3대 전투로 꼽힌다.

    세계일보

    장진호 전투(1950년 11∼12월) 당시 미 해병대 장병들의 모습. 이들은 숫적으로 월등히 우세한 중공군은 물론 혹한의 겨울 추위와도 맞서 싸워야 했다. 미 전쟁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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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전쟁부(옛 국방부)는 1일(현지시간) 장진호 전투 75주년을 맞아 홈페이지에 윌리엄 윈드리치(1921∼1950) 해병대 하사를 조명하는 장문의 글을 게재했다. 6·25 전쟁 당시 미 해병대 일원이었던 윈드리치는 장진호 전투 도중 장렬하게 산화해 명예훈장(Medal of Honor)이 추서된 인물이다. 명예훈장은 미국에서 군인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영예에 해당한다.

    윈드리치는 1921년 미국 3대 도시 중 하나인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참전용사였다. 어릴 때 부모를 따라 인디애나주(州) 해먼드로 이사한 윈드리치는 그곳에서 성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발발 한 해 전인 1938년 윈드리치는 다니던 고교를 중퇴하고 해병대에 입대했다. 애초 그는 예비군 부대 소속이었으나 미국의 2차대전 참전 가능성이 점점 커지던 1940년 11월 현역 병사로 소집됐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은 결국 전쟁에 뛰어들었고, 윈드리치는 기관총 사수가 되어 남태평양 일대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난 뒤 윈드리치는 전역했다. 그는 검정고시를 통해 고교 졸업장을 땄다. 고향의 여자친구와 결혼해 딸을 낳는 등 행복한 가정도 꾸렸다. 하지만 어느덧 군대에 익숙해진 윈드리치에게 민간인 생활은 잘 어울리지 않았다. 고심 끝에 그는 1946년 해병대에 재입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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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윌리엄 윈드리치(1921∼1950) 미 해병대 하사. 6·25 전쟁 당시 장진호 전투에서 용맹하게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했다. 1952년 명예훈장이 추서됐다. 미 전쟁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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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서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캘리포니아주 펜들턴 해병대 기지에서 복무하던 윈드리치에게 한국 파병 명령이 떨어졌다. 그렇게 해서 6·25 전쟁 초반 한국 땅을 밟은 그는 1950년 9월 인천 상륙작전과 서울 수복에 참여했다. 한국군과 미군 등 유엔군의 북진이 본격화하자 윈드리치는 북으로 향하는 미 해병대 제1사단 5대대에 합류했다.

    미 해병대가 함경남도 장진호 부근에 도달한 것은 1950년 11월이었다. 당시 북한의 요청을 받고 참전을 결정한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 장진호 일대에 매복하고 있었으나 미군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11월 26일 중공군의 기습으로 피비린내 나는 장진호 전투의 막이 올랐다.

    첫 교전 후 며칠이 지난 1950년 12월 1일 윈드리치가 속한 중대가 중공군의 공격을 받았다.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나 그는 후퇴하는 대신 부하들을 이끌고 중공군에 맞섰다. 그 사이 동료 해병대원들은 좀 더 안전한 곳으로 옮겨가 새로운 전투를 준비할 수 있었다. 머리에 수류탄 파편을 맞은 윈드리치도 일단 그쪽으로 이동해 원래 부대로 복귀했다. 하지만 그는 치료와 후송을 거부한 채 부하들을 독려해가며 적군의 추가적인 습격에 대비했다. 이윽고 중공군이 다시 공세를 펴기 시작했다. 그러나 윈드리치와 그 전우들의 완강한 저항에 가로막혀 방어선을 뚫지 못했고 결국 더 이상의 싸움을 포기한 채 되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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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수도 워싱턴 인근 알링턴 국립묘지에 있는 윌리엄 윈드리치 해병대 하사의 무덤. 비석에 미군 최고의 영예인 명예훈장(Medal of Honor) 수훈자임을 알리는 표식이 새겨져 있다. 미 전쟁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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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크게 다친 상태였던 윈드리치는 계속되는 출혈과 혹한의 추위를 견디다 못해 그만 쓰러졌다. 들것에 실린 그는 “그냥 자고 싶다”는 말을 남기곤 숨이 끊어졌다. 당시 중공군의 추격을 피해 다급히 퇴각하던 미군은 전사자 시신까지 이송할 여력이 안 되었고, 윈드리치는 일단 장진호 부근에 묻혔다. 정전협정 체결 이후인 1955년 7월에야 유해 봉환이 이뤄져 윈드리치는 미 수도 워싱턴 인근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영면에 들었다. 미 행정부는 고인의 전공을 인정해 1952년 2월 그에게 명예훈장을 추서했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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