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
"우리 중년이야말로 세계의 생산성을 지탱하는 존재인데도, (중략) 중년의 인권은 차별받고 있다. 중년의 피폐는 세계의 번영에 단기적으로 심대한 영향을 미치므로, 중년이 안정되지 않으면 다른 그룹의 인권 향상도 불가능해진다."
일본 시인 요쓰모토 야스히로의 산문시 '세계중년회의'(문학과지성사 펴냄)의 한 부분이다. 화자는 지금 '제1회 세계중년회의에 일본 대표로 참석' 중이다. 주제는 중년 인권의 확립과 향상. 여성, 아동, 소수민족과 마찬가지로, 중년 역시 연약한 존재로 국제사회가 그 인권에 관심을 기울여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얼마 전 인기리에 끝난 TV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와 겹쳐 읽으니, 이 풍자적 작품의 밑바닥에 깔린 그 아슬아슬한 불안이 새삼 와닿았다.
요쓰모토는 일본 현대시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와튼스쿨에서 MBA를 취득한 후, 세계적 대기업에서 일하면서 꾸준히 시를 발표해 온 '샐러리맨 시인'이다. 생활과 예술을 결합한 독창적 시 세계를 개척했다. 시에서 말하는 '우리 중년'은 선진국 남성들이다. 중년의 위기란, 실업의 공포 속에서 가족 생계를 저 홀로 떠안은 가부장제 남성, 전통 가족 유대가 소실돼 고립감에 시달리는 자본주의 남성의 위기다.
회의 진행을 "2년에 한 번씩 가위로 몸이 잘리는" 아멕스 골드카드가 맡은 건 상징적이다. 이 카드는 유효기간만큼만, 돈벌이 기계일 때만 가치가 승인되는 중년 남성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도쿄에서 회사에 다니는 중간관리자"인 화자는 월급이 끊기고 카드가 정지되면 사회적 죽음이 시작되는 잔혹한 현실에 갇혀 있다.
이들은 모두 만성 불안에 빠져 있다. "자산 가치 하락, 해고, 아내들의 성 개방, 아이들 교육 문제, 쇠약해지는 육체와 그것과 상관없이 예고 없이 찾아올 수도 있는 죽음"이 이들을 괴롭힌다. 게다가 인생의 황혼을 앞두고 이들은 '원초적 불안'에 시달린다. 안정된 삶을 얻기 위해 이들이 치러야 했던 희생, 그 억눌린 욕망이 허무로 변해 이들의 내면을 들쑤신다.
아무도 이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집 밖에선 일곱 명의 적이 이들을 노리고, 집에선 비중년에 둘러싸여 있다. 이들이 토로하는 중년성, 삶의 고통과 존재론적 불안은 한낱 푸념처럼 치부될 뿐이다. 그래서 이들은 외롭고 괴롭다. 무엇이 이들을 구할 수 있을까. 드라마 '김 부장'이 작은 힌트를 준다. 직장에서 쫓겨난 김 부장은 아내의 따뜻한 응원과 함께 형의 세차장에서 일을 배우면서 두 번째 인생을 열어간다. 그렇다. 카드가 끊겨도 우애가 작동하는 한 삶은 이어진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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