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지능의 역사(이은수 지음, 문학동네 펴냄)
고대서 현대까지 지성의 역사 조명
인문학 성찰 통해 인간지성 재정의
소크라테스가 문자 문명 우려했듯
AI에 대한 불안감은 기우에 불과
결국 인간이 흡수·활용하게 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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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AI)이 한국인들에게 준 첫 충격은 10년 전인 2016년 3월이었다. ‘신산(神算)’이라는 별명을 가진 이세돌이 알파고 앞에서 어떤 재주를 부려도 넘어서지 못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많은 이들이 인간으로서의 무력감을 느꼈다. 2022년 챗GPT 출시 이후 비약적으로 발전한 인공지능이 일상을 파고들고 일자리를 위협하며 여러 분야에서 놀랄 만한 성취를 보여주자 위기감은 더욱 커졌다. 인간다움의 최후 보루였던 ‘생각하는 능력’까지 기계가 대체한다면 인간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신간 ‘인간지능의 역사’는 이 질문에 답을 찾으려는 철학자이자 인문학자의 시도다. 저자 이은수 서울대 철학과 교수는 현재 서울대 ‘인공지능 디지털인문학 연구센터’를 이끌고 있다. 서울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고전학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수학과 과학 지식의 혁신 과정을 추적하는 연구에서 출발해 인공지능이 주도하는 문명사적 전환 속에서 인문학의 미래를 모색해왔다.
이 책은 인간 지능의 역사를 집중적으로 성찰한다는 점에서 기존 기술 중심의 AI 서적과는 결을 달리한다. 수만 년에 걸쳐 축적된 인간 사고의 혁명, 특히 지난 수천 년 동안 발전한 지성사의 흐름 속에서 인공지능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인간의 사고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를 탐구한다.
저자는 인간 지능을 이루는 네 가지 핵심 행위, 즉 ‘발견’ ‘수집’ ‘읽고 쓰기’ ‘소통’의 역사를 다시 살핀다. 고대에서 현대까지 이같은 지적 활동이 어떻게 진화해왔는지를 따라간다.
‘발견하기’는 고대부터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든 지적 활동이다.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를 외치며 세상의 원리를 알아낸 것처럼 인간은 오랫동안 외부 세계를 관찰하며 자연 법칙을 찾아왔다. 과학기술은 인간의 신체적 한계를 넘어서는 도구를 만들어냈지만, 그 도구가 보여주는 세계를 해석하고 의미를 구성하는 일은 온전히 인간의 역할이었다. 망원경으로 달의 분화구를 관찰한 뒤 지동설을 주장하며 통념에 맞섰던 이가 갈릴레오였듯 기술이 열어준 세계를 이야기로 완성하는 주체는 언제나 인간이었다.
정보와 지식의 ‘수집’에서도 인간 지능의 중요성은 오히려 더 커지고 있다. 지난 한 해 생성된 디지털 데이터의 양이 인류가 5000년 동안 쌓아올린 모든 아날로그 정보의 총합을 넘어섰다는 사실은 인류가 처음으로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많아서 어려움을 겪는 시대에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인공지능이 지식 접근성을 획기적으로 넓혔지만 그 안에서 중요한 정보를 가려내고 가치를 판단하며 방향을 선택하는 일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생성형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가장 위협받는 능력은 ‘읽고 쓰기’다. 챗GPT·제미나이·클로드 등은 방대한 정보를 순식간에 분석하고 요약하며 새로운 텍스트까지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러한 위협은 인류 지성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 아님을 저자는 상기시킨다. 구술 문명에서 문자 문명으로 넘어가던 시기 소크라테스 역시 “문자가 기억력을 쇠퇴하게 하고 사고 능력을 약화시킨다”고 우려했다. 마치 지금 우리가 생성형 AI로 인한 사고 능력 외주화의 위험을 우려하듯이. 하지만 문자가 지식의 저장·전파·축적을 가능하게 하며 인류 지성의 도약을 이끌었다는 점은 인공지능이 인류 문명 발전에 어떤 역할을 할지 시사점을 준다.
마지막으로 인간은 본질적으로 ‘의미를 공유하고 서로 연결되기’를 갈망해온 존재라고 저자는 말한다. AI가 개인 맞춤형 대화까지 제공하며 소통의 영역에 깊숙이 들어와 있지만 삶의 체험에서 비롯되는 이해력과 진실한 관계를 향한 의지까지 대체할 수는 없다.
저자는 결국 인간의 고유함이란 고정 불변의 능력이 아니라 끊임없는 기술 진보 속에서 역동적으로 재정의돼 왔음을 보여준다.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이 “인간은 여전히 구석기 시대의 감성을 지니고, 중세의 제도를 이어받으며, 신과 같은 기술을 다루는 존재”라고 말했듯 인류는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부정→적응→내재화’의 과정 속에서 스스로의 지능을 확장해왔다. 인공지능 역시 이와 같은 궤적을 따라 인간이 흡수하고 활용해갈 것이라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다만 비판적 수용과 주체적인 사용은 인간의 몫이며 빠르게 진화하는 기술과 그에 비해 더디게 변하는 인식·행동 사이의 간극을 능동적으로 좁혀야 한다는 과제도 남는다. 위안과 숙제를 동시에 건네는 책이다. 440쪽. 2만 3000원.
이혜진 선임기자 hasi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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