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하포럼에서 바라본 중동의 변화
박현도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교수 |
국제사회 관련 다양한 문제를 논의하는 공론의 장으로 유명한 카타르의 도하포럼은 올해도 예외 없이 가장 날씨가 좋은 12월에 여러 흥미로운 주제로 시선을 끌었다. 올해는 지난 6월 13일 이란·이스라엘 간 12일 전쟁이 일어났고, 지난 9월 9일에는 이스라엘이 카타르 수도 도하 소재 하마스 지도부를 공격해 지역 내 긴장감이 극도로 올라간 가운데 열리기에 중동정세와 관련하여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궁금증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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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카타르 공습 이후 걸프협력회의 안보 재정비 논의 강화
예전 불편한 관계였던 이란과 주변 중동 국가 간 대화·협력 움직임도
중동에서 미국은 제한적 역할, 유럽은 존재감 상실, 이스라엘은 고립
미국·유럽 영향력 컸던 중동 질서의 축, 지역 국가 중심으로 이동 중
지난 6월 15일 이란 수도 테헤란에 있는 샤란 석유저장시설이 이스라엘의 공습을 받아 불타는 모습. 반(反)이스라엘 정서가 확산하는 상황에서 미국과 유럽은 예전과 같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면서 중동 지역 질서의 축이 이란을 포함한 지역 국가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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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이란 핵 협상을 이끈 당시 이란 외교장관이자 현 페제시키안 정부에서 부통령을 역임했던 모함마드 자바드 자리프, 자심 무함마드 알부다이위 걸프협력회의(GCC) 사무총장, 나탈리 토치 국제문제연구소장이 지난 6일 ‘이란과 변화하는 지역 안보환경’을 주제로 의견을 주고받은 자리에서 중동 질서가 조용하게 근본적으로 재편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이란이 지역 불안정의 근원이고, GCC는 미국의 보호 아래 존재하며, 유럽이 중동의 중재자라는 익숙하고도 오랜 공식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는 현실이 드러난 것이다.
이란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다”
사회를 맡은 ‘퀸시 책임 있는 국정연구소’ 부회장 트리타 파르시는 이란이 지난 2년 동안 상당히 크게 후퇴했다고 말문을 열었다. 여러 대리 조직이 약해졌고 과거의 동맹 시리아가 사실상 적대적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파르시는 이처럼 크게 변한 지역 질서에 이란이 적응했는지가 확실치 않은 가운데 새로운 전략을 세웠는지, 기존 전략을 유지하는 것인지, 아니면 변화가 너무 커서 사실상 마비된 것인지 알기 어렵다면서 “지금 이란은 마비 상태인가” 물었다. 이에 자리프는 대화 내내 이란은 흔들리지 않고 있으며, 지난 수십 년 동안 외부의 집요한 공격을 이겨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자리프는 이란의 건재함을 드러내고자 이란·이라크 전쟁을 거론했다. “사담 후세인이 이란을 공격했을 때 모두가 사담을 도왔고 이란은 몰락 직전까지 갔다. 당시 많은 이들이 이란은 7일 안에 무너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래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이란 문제로 첫 결의안을 내기까지 7일이나 기다렸다. 우리에게는 상승세도, 하강세도 있었다. 현재는 상승세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영원할까? 그렇지 않다. 이란은 지난 거의 7000년 동안 수많은 침략과 점령을 당했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굳건하게 서 있고 계속 그렇게 서 있을 거다.”
타협에서 저항으로 돌아선 이란
자리프는 지난 6월 핵보유국인 미국과 이스라엘 두 나라가 아무런 명분도 없이 이란을 공격했다고 거론했다. 지난 6월 13일 금요일 이스라엘이 공격했을 때 월요일쯤이면 이란이 사라지리라 생각한 이들도 있었다고 하면서 군 지휘관 17명이 희생되었지만 버텼고 이스라엘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음을 증명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미국이 이란을 공격할 때 중동 내 모든 기지 병력을 대피시켰다고 지적하면서 그처럼 이란이 강하다고 강조했다.
자리프는 “우리의 능력은 외부에서 사 온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는 안보를 사들이지 않는다. 핵 능력도 우리가 스스로 개발한 것이다. 그러니 현실을 인정하고 이란과 협력하는 것이 모두에게 이익이다”라고 주장했다. 자리프에 따르면 이란은 저항 전략을 이어오다 JCPOA(포괄적공동행동계획)라는 이름으로 타결된 핵 협상에 임하면서 타협으로 전환해 국내에서 큰 반발을 겪었다. 이란은 저항에 익숙하고, 미국은 강요에 익숙한데 양쪽 모두 익숙하지 않은 전략을 택했으니 반발이 컸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란은 다시 저항 전략으로 복귀했다고 말했다. 자리프는 저항이 최선은 아니지만, 이란은 저항 전략에서 무력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서 이란은 “2년 동안 JCPOA라는 예외적 상황을 경험했고 다시 원래의 익숙한 전략으로 돌아왔다”고 현재 상황을 진단했다.
반(反)이스라엘 정서 확산
자리프의 화살은 자연스럽게 이스라엘로 향했다. 이스라엘이 주변 국가를 이스라엘 땅으로 표시한 ‘대이스라엘’ 지도를 들고나오는 것이야말로 현재 불안정한 중동 지역의 상황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과거 아랍 국가들은 이란을 중동의 문제로 지목했지만, 이제는 상황이 변했다는 것이다. 이에 사회자 파르시는 “미국은 여전히 ‘이란이 지역의 주요 불안정 요인’이라고 하지만, 최근 오만 외교장관이 ‘우리는 오래전부터 이스라엘이 지역 불안정의 주된 원천임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전 정보수장 투르키 알파이살도 같은 말을 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파르시는 알부다이위 GCC 사무총장에게 이스라엘이 문제라는 오만 외교장관의 발언이 GCC 회원국 전체 시각과 같은지 물었다. 알부다이위는 즉답을 피하면서 GCC 회원국 어느 한 나라도 이란이 몰락하길 바라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1980년대에 이란도 GCC 국가에 영향을 준 정책을 시행했고 자신도 이를 직접 경험했다고 전제하면서도 “오늘은 과거를 논의하는 자리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알부다이위는 신뢰를 구축하고 서로에게 안정적인 이웃이 돼야 한다면서 이란과 형제처럼 지내기를 바랐다. GCC 국가가 효율적인 정부와 안정된 정책으로 세계 9위 경제권이 됐는데 이란도 분명 훌륭한 잠재력이 있다고 치켜세웠다. 다만 이란의 혁명 수출 정책, 이웃 국가 내부 문제 개입, 아랍에미리트(UAE)가 주장하는 세 개 섬 영유권 문제 등을 ‘기본적 신뢰 구축’의 저해 요소로 규정하며 이를 해결하지 않고 안보협력으로 뛰어들기는 어렵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스라엘의 카타르 공격 이후 GCC 내부에서 안보 재정비 논의가 급격히 강화된 점도 중요한 변화다. GCC는 더이상 외부 충격을 단순히 지켜보지 않는다. 스스로 안보 구조를 조정하는 단계로 들어갔다. GCC의 메시지는 간결하다. “우리는 미래를 향해 걸어가고 싶다. 그러나 이란이 먼저 신뢰를 보여야 한다.” 조건만 맞는다면 안보를 두고 이란과 충분히 협력할 수 있다는 뜻이다.
중동서 영향력 약해진 유럽
유럽을 대변한 토치는 유럽이 중동에서 사실상 ‘전략이 없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전했다. 유럽이 모두 우크라이나 전쟁에 쏠리면서 ‘러시아와 어떤 관계인가’라는 틀을 통해서만 중동을 바라보다 중동에서 존재감을 잃은 유럽의 잘못을 지적했다.
토치는 또한 미국이 더는 유럽의 이익을 우선하지 않는다는 점을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2015년 JCPOA 이후 유럽은 미국을 따라 이란 문제에서 결정적 역할을 스스로 포기했고 그 대가로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최근 미국의 국가안보전략에서 ‘유럽이 민주주의의 위협’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기까지 했다. 결론적으로 “유럽은 이제 중동의 1차 행위자가 아니다. 새로운 다자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 중심에서 지역 중심으로
자리프·알부다이위·토치, 이 세 사람의 발언에서 드러난 공통점은 중동 질서의 중심이 바뀌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에는 미국-유럽 중심이었지만, 이제는 GCC-지역 국가 중심 질서로 변했다는 것이다. 미국의 역할은 제한적이고 유럽의 역할은 축소됐으며 이스라엘은 불안정 요인으로 고립됐고, 이란과 GCC는 과거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대화를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중동을 ‘지역 행위자 중심의 다극 지역’으로 바꾸고 있다. 향후 몇 년 동안 중동 질서를 결정할 핵심축은 이란·GCC 관계 회복 속도, 이스라엘의 고립 심화 여부, 미국의 중동 개입 축소다. 이스라엘의 공격성이 높아질수록 이란과 GCC는 공통의 이해 관계를 더 강하게 인식할 것이다. GCC와 유럽 일부에서 이미 ‘이스라엘이 위협’이라는 인식이 등장했으며 미국이 전략적 자원을 아시아와 우크라이나에 집중하면서 중동은 점점 더 지역 중심 질서로 이동하고 있다. 유럽은 다시 중동으로 돌아오길 원하지만, 비집고 들어 올 공간이 예전처럼 넓지 않다. 2025 도하포럼은 이란과 GCC 국가 사이에서 ‘전략적 오해’가 줄어들고 이스라엘이 새로운 긴장 축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꽤나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박현도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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