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나니머스1가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The show must go on…)’고 쓴 의미는 분명했다. 2005년 12월 4일 YTN의 ‘PD수첩 협박 취재’ 보도는 황우석 사태를 그렇게 끝낼 뻔했다. 그러나 쇼는 끝나지 않았다. 12월 5일 새벽 5시 28분 브릭(생물학연구정보센터) 소리마당에 오른 이 글은 언론이 상 차리고 엎은 논문 진위 의혹을 과학계 테이블로 옮겼다. ‘PD수첩’이 벼랑 끝에서 떨어지려는 순간 생명과학자들이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바통을 이어받았다.
황우석 팀의 2005년 사이언스 논문 부록에 실린 줄기세포 면역염색사진. 같은 사진을 자르거나 확대해 다른 줄기세포 사진으로 쓰인 것들이 다수 발견됐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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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나니머스의 의혹 제기는 단순 명쾌하다. 11개 환자맞춤형 줄기세포 수립을 보고한 2005년 사이언스 논문에서 같은 사진을 다른 줄기세포인 양 중복해서 썼다는 것이었다. 줄기세포가 11개가 아닐 수 있음을, 논문에 조작이 있음을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였다. 생명과학자들은 삽시간에 사진을 중복 사용한 줄기세포 쌍을 찾아냈다. 1시간 반쯤 지나 중복 사진 4쌍이 발견됐다. 이미지 첨부 기능이 있는 디시인사이드 과학갤러리(과갤) 이용자들은 조작을 한눈에 알 수 있게 포토샵 이미지를 만들었다. 12월 12일까지 중복 사진 총 9쌍이 나타났다. 어나니머스가 ‘PD수첩’이 왜 공개하지 않을까 의아해했던, 정작 ‘PD수첩’은 들여다볼 생각을 못했던, 조작의 과학적 물증이었다.
12월 6일 브릭에서는 DNA 지문 데이터와 관련한 다른 조작 의혹이 제기됐다. 이건 좀 더 어려운 쟁점이다. 체세포와 이를 복제한 줄기세포의 DNA 지문은 같은 마커 부위에서 DNA 피크(DNA가 검출된다는 뜻)가 올라가지만 피크의 높이와 잡음은 조금씩 차이 나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논문의 DNA 지문은 피크의 높이와 잡음까지 완전히 같은 부분이 있었다. 아릉2이 ‘DNA fingerprinting 데이타 살펴보기...’에서 제기한 문제였다.
12월 6일 새벽 0시 19분에 이 글이 게시된 후 문자 그대로 날이 밝을 때까지 440개의 댓글 토론이 이어졌다. 이들은 의혹을 확인하려 DNA 지문을 확대하고 자로 쟀다. 생명과학자라도 DNA 지문 분석을 해보지 않은 이들은 감을 잡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추론과 반론을 이어갔다. 하나의 시료로 두 번 검사를 했을까? 한 개의 DNA 지문을 복사한 것인가? 비전문가들은 도대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다른 커뮤니티에 퍼 날랐다. 질문을 들고 되돌아왔다.
논문 진위 파헤친 단순한 의문들
논문 진위의 과학적 쟁점, 즉 DNA 불일치 팩트와 시약 논란이 나오면서부터 나는 사이엔지(과학기술인연합), 브릭, 과갤을 돌았다. 생명과학자들이 이용하는 브릭이 아무래도 전문적이었다. 브릭 회원은 주로 석·박사 과정생과 박사 후 연구원들이었으나 당시 참여자 중엔 경륜 있는 교수들도 있었다. 어나니머스도 70년대 학번의 중년이었다. 사이엔지도 토론이 활발하고 참고할 만했다. 과갤러들은 줄기세포 중복 사진을 포토샵으로 잘 이어 붙이고는 “딱 맞춰서 환자맞춤형인데 뭐가 문제죠?” 같은 유머를 던져 잠시나마 웃게 했다.
브릭의 의혹 제기와 토론은 사태의 진전과 함께 넓어지고 깊어졌다. 2004년 논문에서도 중복 사진을 찾았다. 미즈메디 연구원들의 논문에서도 조작 증거들이 나왔다. 누군가 의혹을 제기하면 다수가 논문을 뒤졌고 다시 요약 정리하고 이미지를 만들었다. 그런 자료들을 학술지 사이언스와 네이처에, 또 ‘PD수첩’에 보냈다. 나도 그런 이메일을 가끔 받았다. 진상이 즉각 규명되지는 않았기에 토론은 다채롭게 번졌다. 실험으로 재연하게 하자, 해외 학술지에 알리자, 국내에서 자정능력을 보여야 한다는 토론이 이뤄졌다. 그만 덮자, 이걸 덮으면 과학을 할 의미가 없다는 의견도 맞섰다. 줄기세포는 존재하는가, 황우석 팀의 원천기술은 무엇인가, 누가 조작의 원흉인가 같은 쟁점들이 끝없이 올라왔다. 많은 생명과학자가 잠 못 이룬 2005년 겨울이었다.
브릭의 생명과학자들은 황우석 옹호 발언만 하던 기성 생명과학자들과 달랐다. 황우석을 지켜야 생명과학계도 산다는 목소리가 없지 않았지만 다수는 아니었다. 궁금한 걸 해결하는 게 과학자라고, 진실을 찾는 게 과학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어나니머스, 아릉은 'PD수첩' 제작진, 미즈메디병원 연구원이라는 의심도 받았다(아니다). 그들은 그저 진실을 알고자 한 이들이었다. 돌이켜 보면 진실을 밝히려 노력한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순진하고 원칙적이고 단순한 사람들이었다. 내게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과학적 의미를 알려주고 자료를 찾아준 취재원들도 그랬다.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들을 알아서 했다. 12·3 계엄의 밤 여의도로 달려간 그들처럼.
2005년 사이언스 논문에 나오는 DNA 지문 데이터. 위에서부터 줄기세포와 무관한 DNA 지문(Unlreated donor 1~3)에 이어 2~4번 체세포와 복제 줄기세포의 DNA 지문을 보여주고 있다. 체세포-줄기세포 DNA 지문은 같은 마커번호에서 피크가 올라가야 맞지만 피크의 높이와 잡음까지 복사한 듯 똑같은 부위가 발견돼 조작 의혹이 제기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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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적 토론은 통제와 책임에서 가능했다
언론매체 다수가 황우석 편들기에 매몰된 반면 과학계 인터넷 커뮤니티가 토론을 통해 진실에 근접한 건 분명했다. 황우석 사태 후 참석했던 토론회에서 한 언론학자는 인터넷 커뮤니티를 대안 언론으로 규정했다. 언론 중에서도 프레시안, 오마이뉴스 등 인터넷 매체들이 적극 논문 조작 의혹을 제기했기에 기성 언론의 대안으로 보는 시각이 부상했다.
하지만 플랫폼 자체가 진실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은 본질적으로 정보가 많고 자유로운 토론이 가능하다. 내가 뉴스룸에 필요하다고 말했던 문화다. 그러나 인터넷의 정보는 ‘너무’ 많고 ‘너무’ 자유로웠다. 과학적 사실부터 공들여 날조한 거짓까지 섞여 있었다. 네티즌들이 재미와 어그로를 위해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쏟는지 나는 그때 알았다. 인터넷에 떠도는 주장을 보고 깜짝 놀라 확인해 보면 주작(지어낸 허위정보)이었다. 익명의 토론은 비방과 편싸움으로 비화하기 십상이었다. 서프라이즈 같은 친노무현 성향 정치 커뮤니티는 황우석 지지와 음모론으로 치달았다.
브릭의 생산적 토론은 적절한 통제와 관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의혹이 제기되고 주목받으면서 브릭 방문자는 평소 2만 명 수준에서 그 10배로 늘었다. 비전공자가 몰려왔고 황우석 지지-비판으로 갈려 싸움 붙기 일쑤였다. 브릭 관리자들은 펌글·비방·욕설·추측성 내용의 글에는 경고와 삭제, 의도적 규정 위반 시 강제탈퇴, 회원정보 허위 입력 시 영구 회원등록 불가 등 게시판 규정을 며칠에 한 번씩 추가하고 강화했다. 2명의 관리자가 새벽 2, 3시에 맞교대하며 게시글을 모니터링하고 문제의 글들을 삭제했다. 과학적 근거를 갖고 의혹을 제기하는 글은 절대 삭제하지 않았다. 관리자들은 논쟁이 산으로 가지 않도록 잡음을 제거하면서 토론의 장을 지켰다. 오정보를 제거하고 토론의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민주적 토론이나 합리적 결론은 불가능하다.
브릭이 움직인 사태 반전의 지렛대
2000년대는 인터넷 커뮤니티가 왕성하게 성장한 시기다. 다양한 주제, 성향의 커뮤니티가 만들어지고 ‘인터넷 논객’이 이름을 알렸다. 브릭의 토론장은 그중 찬란히 빛나는 한 순간이었다. 브릭 관리자였던 이강수(현재 변화를꿈꾸는과학기술인네트워크·ESC 사무국장)는 2025년 12월 7일 통화에서 “그렇게 치열한 학문적 토론이 온라인에서 폭발적으로 이뤄진 건 다시 못 볼 신기한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진실을 찾으려 애썼을 뿐 아니라 제보자 류영준을 도우려 나선 것도 그들이었다. 그런 것이다. 윤석열 탄핵 시위에 참가한 2030 여성들은 인근 화장실에 생리대를 갖다 두고 나누었다. 지하철 첫차에 맞춰 교대하며 남태령을 지켰다. 진실을 밝히고 부정을 무너뜨리는 평범한 숨은 영웅들이 있다. 브릭도 바뀌었다. 이전엔 생물학 연구 정보를 제공하는 서비스가 중심이었지만 연구원 생활, 대학원생 인권 등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공유했다. 회원들은 정보의 이용자이자 생산자가 됐다. 브릭은 쌍방향 소통을 했다.
황우석 사태 반전의 시작은 분명 브릭이었으나 즉각적인 결과를 낳지는 못했다. 논문 조작의 증거는 대중에 잘 전달되지 않았고 ‘PD수첩’에 대한 분노가 여론을 지배했다. 브릭은 진실 규명을 위한 다른 지렛대를 움직였다. 바로 서울대 소장파 교수들이다.
●'황우석 백서: 왜 우리는 선동에 무력한가' 13회가 내일 계속됩니다.
- ① 2025, 왜 다시 황우석인가
- • [황우석 백서] 거짓은 왜 이토록 성실한가... 진실은 기록되고 기억되어야 한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1917260002506)
- • [황우석 백서] 거짓은 왜 이토록 성실한가... 진실은 기록되고 기억되어야 한다
- ② 난자 파문: 형제, 결별을 선언하다
- • [황우석 백서] 황우석에 돈 받고 논문 로비한 섀튼, 대혼란의 막 올리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1918180003626)
- • [황우석 백서] 황우석에 돈 받고 논문 로비한 섀튼, 대혼란의 막 올리다
- ③ 영웅은 죽지 않는다
- • [황우석 백서] 절대 영웅 황우석... 비난은 고발자 MBC를 향했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2013240005298)
- • [황우석 백서] 절대 영웅 황우석... 비난은 고발자 MBC를 향했다
- ④ 만들어진 신화
- • [황우석 백서] 기적을 예언한 과학자 황우석, 세계 1등 갈망을 채우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2610470002239)
- • [황우석 백서] 기적을 예언한 과학자 황우석, 세계 1등 갈망을 채우다
- ⑤ 제보자는 왜 'PD수첩'을 찾아갔나
- • [황우석 백서] 거짓으로 쌓은 성... 류영준 "제보 말고 다른 선택지 없었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2014410004406)
- • [황우석 백서] 거짓으로 쌓은 성... 류영준 "제보 말고 다른 선택지 없었다"
- ⑥ 노무현이 불붙인 진위 논란
- • [황우석 백서] 줄기세포 DNA 다른데도 황우석 옳다는 기자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2015390000163)
- • [황우석 백서] 줄기세포 DNA 다른데도 황우석 옳다는 기자들
- ⑦ 시약 논란: 팩트의 힘
- • [황우석 백서] "어휴, 그 시약은 쓰면 안 돼요" 과학적 거짓말이 대중을 속였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2016430000223)
- • [황우석 백서] "어휴, 그 시약은 쓰면 안 돼요" 과학적 거짓말이 대중을 속였다
- ⑧ 황의 반격: YTN 청부 취재
- • [황우석 백서] "PD가 협박" 보도에 뒤집어진 세상... YTN 치욕의 특종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2518560001117)
- • [황우석 백서] "PD가 협박" 보도에 뒤집어진 세상... YTN 치욕의 특종
- ⑨ 세계적 특종, 탐사 전말
- • [황우석 백서] "어떻게 이런 사기를..." 충격과 분노로 밤샌 한학수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3020010005219)
- • [황우석 백서] "어떻게 이런 사기를..." 충격과 분노로 밤샌 한학수
- ⑩ 적대적 정파성, 언론의 타락
- • [황우석 백서] 제보자 사냥, 사상 검증... 광풍의 중심 조선일보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2217360002977)
- • [황우석 백서] 제보자 사냥, 사상 검증... 광풍의 중심 조선일보
- ⑪ MBC 항복한 그날 밤
- • [황우석 백서] 모든 걸 휩쓴 YTN 폭풍... 벼랑 끝에서 진실의 응전이 시작되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20612410005936)
- • [황우석 백서] 모든 걸 휩쓴 YTN 폭풍... 벼랑 끝에서 진실의 응전이 시작되다
- ⑫ 브릭이 찾은 조작 증거들(계속)
1 어나니머스
브릭의 익명 계정명을 따 어나니머스로 불리는 그는 70년대 학번의 생명과학 전공자로 알려져 있다. 브릭에서도, 사건 후 한학수와의 만남에서도 그는 실명을 밝히지 않았다.
2 아릉
당시 경북대 박사과정생. 아릉은 DNA 지문 조작 의혹을 제기한 글이 주목받으며 미즈메디 연구원이라는 의심을 받았고 나중에 검찰의 참고인 조사를 받았다.
김희원 뉴스스탠다드실장 h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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