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깜이 평화상’에 팬들 냉소 번져
‘스포츠=정치 중립’ 원칙 지켜져야
5일 미국 워싱턴의 케네디센터에서 열린 2026 FIFA 월드컵 조 추첨 행사에서, 잔니 인판티노 FIFA 회장(왼쪽)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멕시코 대통령,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와 함께 셀피를 찍고 있다. 워싱턴=UPI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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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편성 발표에 무슨 뜸을 그리 들이는지… 뜬금없는 ‘평화상’은 뭐죠?“
지난 6일 새벽 미국 워싱턴 케네디센터에서 열린 2026 북중미 월드컵 조 편성 행사. 생방송으로 지켜본 세계 축구팬 5억여 명(주최 측 추산), 그리고 새벽까지 대기하며 결과를 전하려던 한국 기자들까지 모두 고개를 갸웃했다. 행사의 주인공이어야 할 공인구 ‘트리온다’와 추첨 결과 대신, 예상 밖의 인물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쏠렸기 때문이다.
안드레아 보첼리(이탈리아)의 사전 공연부터 의문을 자아냈다. 세계적 테너 보첼리는 지난 10월 백악관 집무실에서 깜짝 콘서트를 열 만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각별한 인연을 가진 성악가다. 이목이 가장 집중되는 조 추첨 직전. 잔니 인판티노 FIFA 회장은 트럼프 대통령을 ‘세계 평화 증진 공로상(FIFA 평화상)’ 초대 수상자로 호명했다. 화려한 조명 속에 무대에 오른 트럼프 대통령은 스스로 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의 대외 활동을 담은 10분 분량의 헌정 영상과 수상 소감은 덤이었다. 공동개최국 정상 자격으로 참석한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멕시코 대통령과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가 ‘들러리’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행사 진행 역시 아쉬움이 컸다. 개막 1시간이 훌쩍 지나서야 겨우 1포트 조 추점이 시작됐고, 공동 주최국 3개국 자리 추첨이 끝난 뒤 4번째 국가가 호명되기까지 다시 30분이 흘렀다. 어색한 두 남녀 MC의 호흡, 계속 고장 나는 마이크, 자막 없는 스페인어 인터뷰 등 사소한 디테일 실패는 차라리 논외로 하자. 트럼프의 애창곡으로 알려진 ‘YMCA’(빌리지 피플)가 대미를 장식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FIFA 평화상 초대 수상자로 호명되자, 무대에 올라 스스로 메달을 목에 걸고 있다. 워싱턴=로이터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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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트럼프가 평화상을 받느냐’를 따지려는 게 아니다. 축제의 시작을 알리며 전 세계가 축하해야 할 스포츠 이벤트가 정치적 연출에 휘말려 불필요한 논란의 장으로 변질됐다는 점이 우려스럽다는 얘기다. 평화상 절차 자체도 깜깜이였다. 심사위원도, 후보군도, 기준 및 절차도 공개되지 않았다. ‘FIFA는 정치·종교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윤리규정 제15조)는 원칙이 무색해졌다. 국제 스포츠 인권단체 ‘페어스퀘어’가 10일 “인판티노 회장이 정치 중립 의무를 반복적으로 위반했다”며 FIFA 윤리위원회에 공식 제소한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외신들은 이탈리아 독재자 무솔리니가 1934년 이탈리아 월드컵을 선전 무대로 활용한 사례까지 소환하며 FIFA의 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축구 팬들도 “조 추첨부터 ‘정치쇼’ 벌이는 걸 보니, 경기에서도 미국에 유리한 판정이 나올 것” “미국과 맞붙는 팀은 억울한 판정을 각오해야” “미국과 한 조가 아닌 게 다행”이라는 냉소를 쏟아낸다. 스포츠가 정치로 오염됐을 때 나오는 정직한 반응이다.
월드컵은 정치 무대가 아니다. 인류 공통의 언어인 스포츠를 통해 공정한 경쟁과 스포츠 정신을 나누는 특별한 장이다. FIFA 스스로도 강조해온 내용이다. 정치가 개입하는 순간, 스포츠의 가치는 흔들린다. 단순한 원칙조차 지키지 못한다면, 무너지는 것은 결국 오랜 세월 쌓아온 전 세계 축구 팬들의 신뢰다.
지난 4년간 하나의 목표를 향해 흘린 48개국 선수들의 땀과 노력, 그리고 다음 월드컵을 기약하며 또다시 4년을 준비할 더 많은 이들의 열정까지도 불신의 그림자 아래 놓일 수 있다. 월드컵의 가치를 지키는 일은 ‘평화상’이 아니라, 정치로부터 스포츠를 지켜내는 가장 기본에서 시작된다.
강주형 스포츠부장 cubi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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