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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3 (토)

    [한주형의 픽셀] 우주 속 작은 흔적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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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경제

    한주형 사진부 기자


    인간의 손길이 닿은 것 중 보이저 1호는 가장 먼 곳에 이르렀다. 아니, 아직 여정을 멈추지 않았으니 '먼 곳을 향해 가고 있다'는 표현이 맞겠다. 1977년 지구를 떠난 보이저 1호는 목성의 대기와 토성의 고리를 지나며 수많은 비밀을 밝혀냈다. 탐사선은 임무가 끝난 뒤에도 멈추지 않았다. 2012년 태양계를 벗어난 그 불빛은 여전히 초속 17㎞의 속도로 캄캄한 성간의 어둠을 가로지르고 있다.

    그 한구석에는 외계와의 조우를 기대한 인류의 작은 낭만이 실렸다. '골든 레코드'라는 금빛 아날로그 음반이다. 새들의 지저귐과 파도의 철썩임 같은 자연의 소리, 명장의 클래식 음악, 그리고 55개 언어로 전하는 "안녕"이 LP판 위 미세한 요철 사이에 담겼다. 광활한 공허 속으로 인류가 보낸 가장 시적인 메시지였다.

    1990년 명왕성 궤도를 지날 때쯤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NASA에 한 가지 제안을 건넸다. 장착된 카메라 렌즈를 뒤로 돌려 '태양계 가족사진'을 남기자는 것이었다. 탐사선은 처음으로 온 길을 되돌아보았다. 렌즈가 태양계를 향해 돌아간 순간, 보이저 1호의 눈에 비친 장면은 사진으로 남았다.

    사진은 디지털 신호로 분해되어 60억㎞를 날아와 지구에 도착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 태양이 반사된 한 줄기 광선에 0.12픽셀의 작은 점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 티끌 같은 점이 우리 행성이었다. 세이건은 이 사진에 '창백한 푸른 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작은 점 속에 모든 것이 존재했다. 찬란한 문명과 역사, 권력과 욕망, 사랑과 슬픔이 그 안에서 점철되었다. 한 장의 사진은 무한한 우주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작고 하잘것없는 존재인지를 일깨웠다. 희끄무레한 점 하나는 존재와 삶의 의미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다. 세이건은 이를 통해 겸양과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웠다.

    한 장씩 떼어낸 달력이 벌써 마지막 한 장 남았다. 잘 살고 있나. 이맘때면 반복되는 생각이다. 그래서일까, 세밑 추위 아래 온 도시가 연말 분위기로 반짝일 때면 설렘보다 쓸쓸한 기분이 앞선다. 해를 넘기는 일은 너무도 빨라서 청춘은 금세 소진되고 이대로라면 눈 깜짝할 새 늙어 있는 모습을 마주할 것 같아 두려워진다. 미약하고 작은 나, 짧고 순식간인 인생 속에서 무엇을 이루고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그럴 때면 나는 떠나온 곳으로부터 영원히 멀어져가는 불빛 하나를 생각한다. 무중력 공간을 유영하던 탐사선이 수십 년간 걸어온 길을 돌아본 순간을 상상한다.

    어딘가에 족적을 남기는 일이 삶의 의미와 가치라 한다면, 발 디딜 곳을 찾아 나서는 과정 자체가 사는 목적일지도 모르겠다. 운이 좋다면 미지의 세계에 닿아 "안녕"을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떤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짙은 암흑 속에서도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기를 주저하지 않는 의지일 것이다. 우주 먼지처럼 산적한 실패와 남루한 후회, 자잘한 망설임을 전부 뒤로한 채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작은 불빛. 어느 누가 이 위대한 항해를 의미 없다고 할 것인가. 보이저 1호의 불빛처럼 우리 삶도 우주 한가운데 미세한 흔적을 남기며 이어지고 있다.

    [한주형 사진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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