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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8 (목)

    [청계광장]드라마 같은 노벨상 수상자의 탈출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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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니투데이

    (사)과학관과문화 대표, 공학박사 권기균



    가발을 쓰고 국경을 넘었다. 10곳이 넘는 군 검문소를 지나며 신분을 숨겼다. 한 해안 어촌마을에서 소형 목선을 타고 카리브해를 건너 네덜란드령 퀴라소로 이동했다. 이후 전용기에 올라 미국 동북부 메인주 뱅고어를 거쳐 노르웨이 오슬로에 도착했다. 약 두 달 간 준비된 비밀 네트워크가 작동했다. 이 장면들은 모두 실화다. 2025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베네수엘라의 민주운동가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의 탈출 이야기다. 마차도는 우고 차베스와 니콜라스 마두로로 이어진 30년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이끌어왔다. 2002년 투표감시단체 '수마테'를 설립했고 2011~2014년 국회의원을 지냈다. 2024년 야권 단일 대선후보로 선출됐지만 정권의 영향 아래 있던 대법원은 그의 피선거권을 15년간 박탈했다. 체포위협 속에 은신하던 그는 노벨평화상 시상식을 앞두고 극적으로 탈출했다. 악천후로 시상식에는 참석하지 못했고 대신 딸이 연단에 올라 연설문을 대독했다. "억압된 베네수엘라는 다시 숨을 쉴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날 마차도는 오슬로에 모습을 드러냈다.

    노벨상은 세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영예다. 그러나 이 상이 언제나 안전했던 것은 아니다. 한 세기 전 유럽에서도 노벨상은 축복이 아니라 위험의 표식이 된 적이 있었다.

    1935년 나치수용소에 감금돼 있던 독일 언론인 카를 폰 오시에츠키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하자는 국제적 움직임이 일어났다. 국제적십자사는 그의 상태를 이렇게 전했다. "한쪽 눈은 부어오르고 이는 뽑힌 채 부러진 다리를 질질 끌고 있었다." 나치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그해 수상자가 결정됐다. 아돌프 히틀러는 격분해 1937년 독일인은 노벨상을 받지도, 수락하지도 말라는 금지령을 내렸다. 그 순간부터 나치 치하의 유럽에서 노벨상은 신변을 위협하는 신호가 됐다. 이 분위기 속에서 덴마크 코펜하겐의 닐스 보어 이론물리학연구소는 유럽 과학자들의 피난처가 됐다. 그러나 1940년 독일군이 덴마크를 점령하자 연구소도 곧 수색대상이 됐다. 연구소 안에는 치명적인 물건이 2개 있었다. 막스 폰 라우에와 제임스 프랭크가 맡겨놓은 노벨상 금메달이었다. 두 사람은 히틀러의 노벨상 금지령을 공개적으로 거부한 과학자들이었다. 땅에 묻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보어는 다시 발굴될 위험이 있다며 반대했다. 대신 메달을 녹이자는 결정을 내렸다. 실행은 헝가리 출신 화학자 게오르크 드 헤베시의 몫이었다. 금은 대부분 산에 녹지 않지만 염산과 질산을 3대1로 섞은 왕수에는 녹는다. 헤베시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침략군이 코펜하겐 거리를 행진하는 동안 나는 라우에와 프랭크의 메달을 녹이는 데 여념이 없었다." 노벨상 금메달은 왕수 속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전쟁이 끝나고 헤베시는 연구실로 돌아왔다. 구리조각을 왕수병에 넣자 구리가 녹으면서 한쪽에서 금이 다시 나왔다. 구리의 이온화 경향이 금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이 금은 1950년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에 전달됐고 노벨재단은 이를 다시 주조해 1952년 새 노벨상 메달로 수여했다. 헤베시는 1943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1943년 가을 어머니가 유대계였던 보어 역시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았다. 보어는 작은 어선을 타고 탈출했다. 그가 스웨덴으로 탈출했다는 소식에 영국 정부는 즉각 그를 런던으로 불러들였다. 그는 1943년 10월6일 독일 점령지를 피해 고고도로 비행하는 영국해외항공공사(BOAC)의 모스키토 항공기를 타고 스코틀랜드에 도착했다. 머리가 커 산소마스크가 제대로 맞지 않았던 그는 비행 중 한때 의식을 잃었다가 항공기가 북해 상공의 낮은 고도로 내려온 뒤에야 깨어났다. 이들의 탈출은 개인의 선택이 아니었다. 시대가 그들을 밀어냈다. 과학자들은 연구자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조국을 떠났고 민주운동가는 민주주의를 위해 숨어야 했다. 한 세기가 흐른 지금, 마차도의 탈출은 이 오래된 역사를 다시 불러낸다. 노벨상 수상자들의 탈출작전은 과거의 일화가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은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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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왼쪽부터 닐스 보어, 제임스 프랭크, 아인슈타인, 라비.



    권기균 과학관과문화 대표·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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