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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근 | 동네 사회학자
근미래를 상상한 영화 ‘블레이드 러너’(1982)에는 인간을 위해 일하는 인조인간 레플리컨트와 특수경찰 블레이드 러너가 등장한다. 4년이라는 짧은 수명에 맞서 레플리컨트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데커드 등 블레이드 러너들이 이들을 추적, ‘퇴역’시킨다. 데커드는 레플리컨트 로이의 아내와 동료들을 제거한 뒤 로이와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 분노한 로이는 막상 데커드가 죽음에 몰리자 손을 뻗어 구해준다. 마주한 둘, 그때 로이의 수명이 막 끝난다. ‘청춘’의 기억을 주마등처럼 떠올리며 죽어가는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그 모든 순간들이… 곧 사라지겠지. 마치… 빗속의… 눈물처럼.” 인간적인 인조인간과 비인간적인 인간의 대비가 서늘하다. 누가 인간인가?
인조인간을 생산하는 기업가가 수명을 4년으로 제한한 이유는 뭘까? 새 인조인간을 팔아 이윤을 극대화해야 하고, 4년쯤 되면 감정도 생기니 위험하다고 본 것이다. 한국의 이주노동자 정책과 꼭 닮았다. 오래 일하면 싼 임금으로 부리기 어렵고, 한국 사회와 정서적 애착이 생기면 돌려보내기 어렵다고 여긴다. 비전문 취업비자(E-9)의 경우 기본 3년의 ‘수명’을 부여하고 문제가 없으면 1년10개월 연장이다. 출국 뒤 추천받아 재입국하면 저 과정을 한번 더 반복할 수 있다. 최장 9년8개월 후면 무조건 ‘퇴역’.
한국에 이주노동자가 들어온 것이 1980년대 후반이니 이제 40년이 다 되어간다. 농촌의 풍부한 ‘잉여 노동’이 노동력 공급처가 된다는 ‘이촌향도’의 신화는 1980년대 중반에 끝났다. 그때부터 한국은 노동력 부족 국가였다. 관광비자로 들어와 미등록으로 일하던 이주노동자들이 1994년부터 산업연수생 제도로, 2004년부터는 고용허가제로 일한다. 개선점도 있지만 사용 기한이 끝나면 돌아가라는 방침은 여전하다. 장기체류와 정착의 길은 멀고 험하다.
인조인간조차 기억과 애착이 생긴다. 진짜 사람인 이주노동자에게 질긴 기억이, 사랑과 미움이, 애틋한 인연이 생기고 쌓이는 건 당연하다. ‘노동력을 불렀는데 사람이 왔다’는 말처럼 사람은 ‘일하는 기계’가 아니다. 사람을 부를 때는 이걸 감당해야 한다. 3년 기한으로 한국인 광부와 간호사를 불렀던 독일이 반발에 밀려 결국 무기한 체류권과 영주권을 준 것도 그래서였다.
그렇게 기한 넘겨 꿈을 키우고 삶을 만들어온 이들이 있다. 필리핀 출신 다닐로 알게라씨는 산업연수생 제도가 시작된 1994년, 스물세살 때 한국에 왔다. 부산의 자동차 부품공장에서 일하던 1997년에 같은 공장의 필리핀 친구가 감전 사고로 사망하면서 이주노동자의 인권 문제를 깨달았다. 13년간 미등록 신분을 감내하며 활동가로 살게 된 계기다. ‘㈔이주민과 함께’와 부설기관에서 일하며 이주노동자의 권익 증진에 힘썼다. 필리핀 공동체 ‘사피나코’를 조직해서 친목을 도모하고 고국을 도왔다. 2010년 이래 해마다 5천여명의 필리핀 아이들에게 책가방과 학용품을 지원하고 있다.
스리랑카 출신 다누시카 라나퉁가씨는 2004년, 스무살 때 한국에 왔다. 여러 어려움을 이겨내고 파주의 한 공장에서 과장으로 일한다. 지역의 스리랑카 공동체를 이끌고, 파주이주노동자센터의 이사로도 애쓰고 있다. 비전문 취업비자로 입국했지만 한국어 능력, 소득, 자산 등에 대한 힘든 심사를 거쳐 우수 숙련기능인력 비자(F-2-6)로 전환했다. 덕분에 부인과 딸 둘을 데려와 함께 산다. 첫째 딸은 스리랑카에 한국어를 알리는 유튜브 영상도 만들어 올린다. 두 문화 사이 가교가 되고 있다.
우수 숙련기능인력 비자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은 여러 기업에서 과장, 팀장 등으로 일하며 한국 산업의 허리 역할을 맡고 있다. 하지만 차별은 여전하다. 한국인 중산층 이상의 소득과 자산 보유를 입증해야 하는 영주권 신청은 꿈도 꾸기 어렵다. 가족비자(F1)인 배우자는 ‘알바’로도 취업할 수 없다. 최근 정책 변경으로 우수 숙련기능인력 비자가 없어지면서 다누시카씨 부부는 거주비자(F-2-99)로 바뀌었다. 덕분에 부인도 취업할 수 있게 됐지만 거주 기한이 3년에서 2년으로 줄었다. 약을 주며 병까지 줬다.
이주노동자 자체를 부정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이들 없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함께 살고 싶지 않다는 정서는 상당하다. 어울려 산 경험이 짧으니 그럴 만도 하다. 공공연한 혐오까지 용인할 수는 없다. 차별과 비극의 근원인 탓이다. 지난 7월 전남 나주의 벽돌공장에서는 스리랑카 출신 이주노동자가 비닐 랩에 싸인 채 지게차에 매달려 학대받는 사건이 발생했다. 10월에는 베트남 출신의 스물다섯살 청년 여성 뚜안씨가 ‘불법체류 외국인 정부합동단속’ 과정에서 숨졌다. 대구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해 두 나라를 잇는 꿈을 꾸던 뚜안씨였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몸을 불살랐다. 어제 전태일이 선 자리에 오늘 이주노동자가 있다. 한국인 노동자가 기계가 아니듯 이주노동자도 기계가 아니다. 우리는 모두 사람이다.
12월18일이면 1990년 유엔이주민권리협약이 체결된 지 35년이 된다. 한국은 물론 이주노동에 의지하는 ‘선진국’ 대부분이 협약을 비준하지 않고 있다. 염치없는 짓이다. 다닐로 알게라씨는 협약을 기념하며 지난 7일, 성공회대에서 열린 세계 이주민의 날 행사에서 제6회 미누상을 받았다. 이주노동자운동에 앞장서다 추방되고 숨진 네팔 출신 미노드 목탄을 기리는 상이다. 수상 연설에서 한국에 처음 온 때를 회고했다. 한국인들이 “너 몇살이냐?”라고 반말로 묻던 젊은이가 지난여름 공장에 재취업할 때는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하고 존댓말을 들었다며 청중을 웃겼다. 법적 한국인이 된 다닐로씨는 31년을 산 한국을 조국으로 느낀다고 내게 말했다. 그와 같은 이들 덕분에 한국이 좀 더 나은 세상이 됐다.
빛나던 스물, 스물셋의 청춘 다누시카와 다닐로를 떠올리며 스물다섯 뚜안을 떠올린다. 두 사람처럼 뚜안씨도 중년이 되어 청춘을 아름답게 기억하고 싶었으리라. 우리의 혐오가 그 꿈을 앗았다. 기계는 청춘을 기억하지 않는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다. 뚜안씨와 가족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뚜안씨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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