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의 항구성과 일관성을 강조하며 원칙의 수호자를 자임한다. '필요하다면 금융시장을 활용할 수도 있다'며 슬쩍 대안을 제시하지만 규제 완화는 불가하다는 게 그의 원칙이다.
한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본업'은 한 번 정해지면 영원히 고정되는 개념인가. 그렇지 않다. 기업의 주력 사업은 기술 변화와 시장 수요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예컨대 이번 민원의 주역으로 지목되는 그룹은 1980년대 정유회사였다. 이후 통신업을 본업으로 삼았다가 지금은 반도체가 몸체다. 2차 전지, 바이오 등도 미래 사업으로 키운다. 이런 진화를 위해 지주사는 투자회사 성격을 강화해 왔다.
게다가 AI(인공지능) 시대는 기업 전략의 판을 완전히 바꿔놓고 있다. AI 인프라 구축, 첨단 바이오, 반도체 생산능력 확대 등은 더 이상 선택적 투자나 주변 사업이 아니다.
산업 생태계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이자 기업의 존폐와 직결된 본업 그 자체다. 이런 투자를 추진하기 위해 금융 역량을 활용하거나 전문 투자회사를 세우는 것은 '외도'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확장'이다. 문제는 낡은 규제가 이 확장을 가로막는 현실이다.
# '테세우스의 배' 역설이다. 배의 부품을 하나씩 바꿔 결국 전부 새것이 됐을 때, 그 배를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라 부를 수 있을까. 이 '새 부품으로 된 배'와 '버린 부품들로 다시 조립한 배', 둘 중 진정한 테세우스의 배는 무엇인가
금산분리 규제에도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지난 수십 년간 금산분리 규제는 예외와 보완, 개정을 거치며 수없이 '판자'를 갈아 끼워왔다. CVC(기업형 벤처캐피탈) 규정, 외국인 투자 관련 예외 조항 등 시대의 요청에 따라 부분적으로 수정되고 보완됐다. 지금의 규제가 '50년, 서구 100년 된 그 규제'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할 수 있나.
'규제 개혁'이라 자평하지만 땜질의 연속일 뿐이다. 이번에도 첨단산업을 대상으로 극히 예외적으로, 한시적으로 규제를 풀며 판자 하나를 교체한다. '안 하는 것보단 낫다'는 시각도 있으나 찔끔찔끔 판자 하나 바꾸는 방식으로 시대 변화에 대응했다고 자위하는 건 답답한 노릇이다.
물론 분명히 해야 할 점이 있다. 대기업의 금융지배력 확대, 사금고화를 허용하자는 게 아니다. 금산분리에 묶여 빠르게 변하는 산업 환경에 제때 대응하기 어려운 현실을 직시해 달라는 것이다.
# 처음으로 돌아가 '본업 충실'을 묻는다. 공정위의 본업은 바로 경쟁 촉진이다. 경쟁을 촉진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은 혁신과 투자다. 기업들이 새로운 기술과 산업에 대규모 자본을 투입하는 것은 시장 창출과 경쟁력 강화의 토대다.
무엇보다 경쟁의 범위는 국내에 국한되지 않는다. 글로벌 기업들은 투자-금융-데이터가 결합된 구조를 고민한다. 미국·유럽의 빅테크들은 투자회사를 보유하며 막대한 자금력으로 투자를 쏟아붓는다. 자본력 자체가 곧 글로벌 경쟁력인 시대다.
규제를 보존하는 게 규제 당국의 역할은 아니다. 시장 변화에 맞는 새로운 경쟁 질서를 설계하는 것이 정부의 책무다.
금산분리 완화, 새로운 제도 마련이 '최후의 카드'가 돼선 안 된다. 첨단 산업 투자 활성화를 위한 제도 개선은 필수 카드이자 선결과제다. 샌드박스, 특례, 특별법…. 언제까지 '예외'라는 이름의 땜질 처방에만 기댈 것인가.
지금 필요한 것은 규제의 역사성이 아니라 기능성이다. 시대가 달라졌다면 제도도 변해야 한다. "살아남는 종은 가장 강한 종이 아니라,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는 종이다." (찰스 다윈)
박재범 경제부장 swallow@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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