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학 프리즘투자자문 대표 |
한국의 50~60대는 물이 가득 찬 저수지를 앞에 두고도 목이 마른 사람과 닮았다. 집도 있고, 연금도 있고, 경력도 있다. 없는 것이 아니라 흐르지 않는다. 노후의 위기는 흔히 60대 이후의 문제로 이야기되지만 실제 균열은 은퇴 이후가 아니라 은퇴 직전에 먼저 나타난다. 50대는 자산이 정점에 이르지만 동시에 현금흐름이 꺾이기 시작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숫자만 보면 착시가 생긴다. 우리나라 55~64세 고용률은 OECD 평균보다 높다. "아직 일할 수 있지 않느냐"는 말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그러나 이 통계가 말해주지 않는 것이 있다. 어떤 일인가, 얼마를 벌 수 있는가의 문제다. 즉 고용의 질이다. 주된 일자리에서 물러나는 평균연령은 정년보다 훨씬 이르고 이후의 일자리는 임금과 안정성에서 큰 차이가 난다. 일은 이어지지만 소득이 급격히 낮아지는 구조, 이것이 50대 이후 현실이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국민연금은 대부분 사람에게 기본적인 안전망일 뿐 생활을 온전히 책임질 수준이 아니다. 퇴직연금이라는 두 번째 기둥도 아직은 든든하지 않다. 적립금 규모는 400조원을 넘어섰지만 실제 인출단계에 들어가면 여전히 일시금을 선택하는 비중이 훨씬 높다. 한 번에 받은 돈은 몇 해 지나지 않아 사라지고 다시 소득공백이 드러난다. '자산은 남아 있지만 월급이 없는 노후.' 이 장면은 우연이 아니라 구조의 결과다.
시선을 미국으로 옮기면 다른 그림이 나온다. 미국의 은퇴자가 한국보다 특별히 더 부유해서는 아니다. 차이는 자본을 다루는 방식에 있다. 미국에서는 자산을 '언젠가 팔기 위한 덩어리'가 아니라 '나눠 받을 조각'으로 설계해왔다. 배당을 주는 주식, 분배금을 나누는 펀드와 ETF, 리츠 같은 자산들이 연금계좌 안에서 자연스럽게 결합한다. 크지 않은 금액이라도 매달, 분기마다 현금이 들어온다.
한국의 문제는 파이가 작아서가 아니다. 파이를 키우는 데 몰두하지만 잘게 나누는 데는 서툴렀다. 주식은 여전히 시세차익의 그릇에 담겨 있고 연금은 적립단계에서 멈춰 있다. 그러니 시장이 횡보하거나 흔들릴 때마다 소득도 함께 불안해진다. 은퇴 이후를 버티는 힘이 특정 자산의 성과에 과도하게 의존하게 되는 구조다.
이제 필요한 전환은 과감한 베팅이 아니라 설계의 변화다. 하나의 커다란 수익을 기대하는 대신 여러 개의 작은 현금흐름을 만드는 방식이다. 주식, 채권, 배당자산, 대체자산을 나눠 담는 파이형 포트폴리오, 그리고 퇴직연금의 단계적·분산인출 설계가 결합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수익률의 최대치가 아니라 지속가능성이다. 연금화와 분산투자는 덜 버는 선택이 아니라 '덜 흔들리는' 선택이다.
다시 저수지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한국의 50~60대는 어느 정도 모아뒀지만 수도관을 늦게 깔았다. 반면 미국의 은퇴자는 저수지보다 먼저 파이프라인을 놓았다. 노후의 질을 가르는 것은 자산의 총량이 아니라 매달 흐르는 물줄기다. 50대는 은퇴를 기다리는 나이가 아니다. 자본의 물줄기를 트게 할 수 있는 거의 마지막 시간이다. 이 파이프라인을 놓느냐, 놓치느냐에 따라 노후의 풍경이 완전히 달라진다.
이윤학 프리즘투자자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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