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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원 | 타이포그래피 연구자·글문화연구소 소장
겨울은 어둡지만 반짝이는 계절이다. 햇빛과 열이 모두 부족해서, 어둡고 춥다. 이 혹독한 시기에 인간을 구원해줄 구세주를 기다리고 그 탄생을 축하하며, 사람들은 반짝반짝 빛을 밝힌다. 희망의 빛이다. 그런데 빛은 모든 곳을 공평하게 비추고 있을까? 취약한 곳들이 빛을 받지 못하고 있을 때, 아름답게 반짝이는 빛이 역설적이게도 어둠 속 약하고 힘든 존재들을 은폐하는 것은 아닐까?
겨울에 앞선 가을은 색채가 무르익는 계절이다. 한국어에는 색의 미묘한 상태 차이를 구분하는 표현이 풍부하다. 파릇파릇과 짙푸름, 발그스름과 빨강 사이에는 시간에 따른 숙성의 차이, 계절감마저 느껴진다. 농경사회에서 작물이 익어가는 상태를 언어 표현으로 구분하는 일은 수확량, 나아가 생계에 직결되었을 것이다. 자연히 사람들의 관심이 몰렸고, 이런 곳에 단어가 풍부해지면서 사회적인 힘이 생긴다. 어휘들의 양지다.
그렇다면 음지가 있을 것이다. 분명하게 존재하는 어떤 상태나 개념, 정서에 대해 이름을 얻지 못한 곳이다. 사회적 관심을 덜 받는 곳, 이곳에 약자, 소수자, 장애인의 숨죽인 목소리가 있다. 색채찬란의 이면, 그늘에는 이렇게 ‘단어의 빈자리들’이 있다. 사전 속 단어들은 마치 중립적인 듯 나열되어 있지만, 사실 단어 전체의 분포를 보면 몰린 곳과 희박한 곳이 있다. 이 분포는 밀도 지도를 그린다.
‘이름 없음’은 곧 ‘배제되어 가시화되지 못한 것’이다. 명명되지 못했기에 알아채기도 어렵다. 이 어둠을 뚫고 나온 목소리의 한 사례로 소설 ‘헌치백’을 소개하고 싶다. 저자 이치가와 사오와 주인공 샤카는 ‘헌치백’이라는 제목 그대로 등이 굽은 중증 척추장애를 갖고 있다. ‘정상’이라 간주하는 사람들의 세계에 약한 목소리가 문학의 힘으로 어둠을 뚫고 나와 들려온 것이다.
이 책의 다음 문장이 특히 내게 두가지 깊은 고민을 안겼다.
“‘종이 냄새가’, ‘책장을 넘기는 감촉이’ … 라고 문화적 향기 넘치는 표현을 줄줄 내비치기만 하면 되는 비장애인은 아무 근심 걱정이 없어서 얼마나 좋으실까.”
책을 읽기조차 어려운 신체 상태에 대한 ‘이름’이 없다는 것. 그리고 종이책의 문화적 향기를 근심 없이 즐겨온 나의 기쁨에 대해, 나는 어떤 사회적 태도를 가져야 하느냐는 것.
첫번째 고민에 관해, 철학자 미란다 프리커는 약자의 언어 결핍은 곧 권력 구조의 결과로 인한 사회적 언어 자원 결핍이라고 말한다. 독서는 정신적인 행위로 이해되기에, 신체의 불편과는 큰 관련이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척추 장애인에게 종이책은 ‘등뼈가 찌부러지는 고통’을 준다. ‘지식의 습득을 저해하는 신체 상태’가 세상에는 존재하고 또 그 해결책을 요청하지만, 이 상태는 단어로 명명되지는 않고 있다. 이런 결핍들에 대한 침묵 상태를 적어도 인지는 하는 것이 사회구성원으로서 윤리적 책무 아닐까.
두번째 고민. 종이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쁨은 어디로 가야 할까? 내려놓아야 할까? 그럴 수는 없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종이책의 물리적인 특성마저 차별이 된다는 사실을 인지한 이상, 기쁨의 질적인 성격을 바꿀 수는 있다. 타인의 아픔에 마음을 쓰면서 나의 태도를 정제하여, 천진한 기쁨에서 그늘을 아는 성숙한 기쁨으로 바꾸어가는 것이다.
반짝이면서도 어두운 계절 겨울이 왔다. 빛을 기뻐하며, 동시에 우리가 다 모르는 것들로 가득한 어둠 속 존재들, ‘단어의 빈자리들’을 겸손하고도 신중하게 헤아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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