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19일 서울 종로구 동화면세점 인근에서 자유통일당이 연 ‘국민저항권 광화문국민대회’ 참가자들이 ‘윤 어게인’이 적힌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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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훈 | 서울여대 교수(현대철학)
박근혜 탄핵 때부터 모습을 드러낸 사람들이 있다. 양손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드는 사람, 검은색 선글라스에 군복을 입은 사람, 할렐루야를 외치면서도 폭언을 일삼는 사람. 이들은 윤석열 등장 이후 청년층과 유튜버로 세를 확장하더니 급기야 12·3 내란을 전후로 폭력화로 치달았고, 탄핵 이후에도 광화문 광장을 제집처럼 사용하며 “윤-어게인”을 외치고 있다.
언론이나 정치권에서는 윤석열과 이들을 ‘극우’로 지칭한다. 그런데 극우가 과연 적합한 이름일까? 일본의 극우 세력은 천황주의, 국수주의, 군국주의를 표방한다. 미국의 극우는 기독교 근본주의, 백인 우월주의, 패권주의의 조합이다. 이들이 말하는 이념에는 다소 편차가 있지만 민족적, 인종적 우월감을 주장하며 외국인을 혐오하고, 지역이나 세계적 차원에서 패권을 추구한다는 점은 같다. 하지만 주변 강대국을 구세주처럼 여기며 굴종적 태도를 보이는 우리나라 극우가 과연 민족적 우월감과 패권주의라는 의미의 극우일까?
일각에서는 우리나라 극우를 파시즘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파시즘은 외견상 카리스마적 지도자와 광범위한 대중이 일체가 되어 만들어낸 강력한 권위주의적 정치 체제를 말하며, 이러한 일체화는 민족이나 인종적 동질성, 내·외부 적에 대한 적대감, 잃어버린 과거의 영광을 되살리자는 신화적 열망 등을 통해 만들어진다. 우리나라 극우가 보여준 과거 독재체제에 대한 향수, 공산 전체주의 세력과 중국에 대한 적대감은 가히 파시즘적 요소로 해석될 수 있지만, 이를 파시즘으로 규정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
파시즘은 윤리나 가치 의식이 마비된 채 오직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회 구성원을 도구처럼 이용하는 ‘도구적 합리성’이 극단화된 정치 형태이기도 하다. 하지만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드는 사람들이 보여준 광기와 주술적 세계관은 합리성은커녕 강자에게는 자학적으로 복종하고, 약자에게는 가학적 폭력을 행사하는 사드-마조히즘적 증상처럼 보인다.
지난 13일 열린 ‘12·3 계엄사태 이후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 학술대회에서 이지선 박사가 발표한 헤겔의 ‘천민’ 개념에 관한 논문은 우리나라 극우를 이해하는 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천민이란 단어는 빈곤하고 신분이 낮은 사람을 떠올리게 하지만, 헤겔이 말하는 천민은 ‘천민적 심성’을 가진 사람이다. 부유한 사람 중에는 부와 성공을 일종의 특권적 ‘권력’처럼 느끼면서, 자신은 흡사 법적 적용 대상이 아닌 법질서 밖의 존재처럼 인정받기를 원하며 모든 사회적 의무를 방기하지만, 역설적으로 사회가 자신을 주인처럼 모시기를 요구하는 사람이 있다. 빈곤한 사람 중에는 사회에서 버림받았다고 분노하면서 자신은 법질서 밖의 존재인 양 모든 사회적 의무를 저버리지만, 역설적으로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아도 사회가 다 책임져 주길 요구하는 사람이 있다. 천민은 이처럼 자신은 법질서 밖에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모든 사회적 의무를 방기하면서도 사회적 특혜만을 원하는 사람이다.
우리나라 극우는 천민과 닮았다. 윤석열 정권을 형성한 학벌 권력층은 흡사 부유한 천민처럼 법질서 밖의 초법적 존재인 양 민주적 법질서를 훼손하면서도, 온갖 특권을 누리며 이 나라의 주인처럼 행세한다. 과거 군부독재 추종 세력은 흡사 가난한 천민처럼 민주화된 대한민국에 박탈감을 느끼며 이에 분노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의무를 저버리고, 타인의 자유와 인권마저 훼손하려 한다. 그러나 정작 이들은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은 채 민주화의 열매만을 따 먹으려 한다.
이들은 일본과 미국의 극우처럼 민족적, 인종적 우월성을 주장하는 패권주의자도 아니고,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복종하며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자며 사회 구성원 전체를 도구적 합리성에 따라 재조직하려는 파시스트도 아니다. 그렇기에 ‘정치적 천민주의’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이들을 봐야 하지 않을까.
윤석열? 김건희? 내란사태 최악의 빌런은 누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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