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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9 (금)

    [서아람의 법스타그램] [3] 법정도 이미지 전쟁터, ‘감형을 위한 패션’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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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판 날 어떤 옷을 입고 가야 하죠?” 의뢰인들이 종종 묻는다

    명품 정장, ‘물광’, 악세서리, 맨발 금지… 재판도 일종의 면접

    조선일보

    일러스트=이철원


    “아, 진짜 미치겠네. 다른 옷 뭐 입을 거 없어요?”

    한파가 몰아치는 오후, 가정법원 복도에서 한 변호사가 의뢰인 가족을 들볶고 있었다. 소년 재판을 기다리는 시간은 늘 붐비고 복잡하지만, 옷 타령을 듣는 건 또 처음이다. 슬쩍 옆을 보니 대충 상황을 알 만하다.

    변호사가 학생에게 교복을 입고 오라고 했는데, 학생이 입고 나온 교복 치마가 속옷이 보일까 말까 아슬아슬한 길이인 게 문제였다. 교복을 고쳐 입으려는 10대의 반항심은 세대가 달라져도 바뀌지 않나 보다. 여벌 옷은 이거뿐이라며 보라색 체육복을 꺼내 드는 학생에게 변호사가 한숨을 내쉰다. 내가 저 상황에 있지 않아 다행이다. 내 의뢰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단정한 교복 차림인 데다, 명찰도 똑바로 달았다. 새로 다듬은 지 얼마 안 된 머리 스타일은 어린 나이를 강조하는 듯하다. 백점 만점이다.

    “재판 날 어떤 옷을 입고 가야 하죠?”

    의뢰인들에게 종종 듣는 질문이다. 이 문제로 며칠씩 고민하는 사람도 있다. 역시, TPO(시간·장소·상황)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국인답다. 아니, 이건 한국인만의 특징이라고는 할 수 없다. 외국 또한, 유명 정치인이나 연예인이 재판을 받으면 무슨 브랜드 옷을 입었고, 어떤 명품 안경을 썼고, 어느 나라에서 만든 가방을 들었는지 사사건건 보도하니까 말이다. 2010년대 음주 운전, 마약, 절도 등 다양한 혐의로 할리우드 여배우들이 연달아 법정에 출석했을 때, 타블로이드 신문들은 ‘오늘의 법정 룩 점수’를 채점해 랭킹 매기는 특집을 하기도 했다.

    사실 법정에 특별한 드레스 코드 같은 건 없다.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법정 내 게시물에서 ‘법원에 대한 존중을 표현하는 비즈니스 캐주얼’ 복장을 권고하면서 “모자, 트레이닝복, 찢어진 청바지, 선글라스 등은 착용하지 말아 달라”고 안내한다. 보수적인 법정 문화를 가진 일본에서는 재판장이 소송 지휘권을 통해 사건 당사자나 방청객의 복장을 통제할 수 있는데, 현란한 무지개색 양말을 신고 온 방청객에게 양말을 보이지 않게 가리라고 지시했다가 그 방청객이 권리 침해라고 반발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법정에서는 양말 때문에 밖으로 쫓겨나는 일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호사들이 복장에 신경 쓰는 것은, 당연하게도, 판사에게 좋은 인상을 주어 조금이라도 나은 판결을 받고 싶은 마음에서다. 의뢰인들에게 ‘평범한 정장 또는 세미 정장’을 입고 ‘단정한 모습’으로 나타나라고 강조하는 이유도 같다. 특히 재범 위험성이 있느냐 없느냐가 양형의 핵심이 되는 사건에서는, ‘우리 의뢰인이야말로 이 사회의 모범적이고 성실한 시민’이라는 점을 복장으로 소리 없이 외치는 것이다.

    피어싱은 빼고, 문신은 가리고, 머리가 노란색이라면 까맣게 염색하고. 고가의 명품 정장을 입는 건 안 된다. 오만하고 잘난 척한다는 느낌을 줄 필요는 없으니. 여성이라면 메이크업도 중요하다. 스모키 메이크업이나 ‘물광’은 금물. 액세서리는 하지 않거나 눈에 띄지 않는 게 좋다.

    듣다 보니 그냥 면접 룩 아니냐고? 맞다. 재판도 일종의 면접이다. ‘채용’ 대신 ‘판결’로 내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면접. 에르메스 스카프를 가방 속에 숨김으로써 형량을 3개월이라도 깎을 수 있다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숨기는 게 낫지 않겠는가. 그러니 판사 앞에서 신발을 꺾어 신고 걸어 다니는 건 자제하자. 맨발도, 발가락 화장도 참자. 그리고 제발, 아무리 애착 아이템이어도, 법정에 삼선 슬리퍼를 신고 오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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