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 출신 곳곳에 포진한 미 정부
최근 행보 보면 사모펀드 빼닮아
핵심은 자국이익 최우선 머니게임
대미 외교, 냉혹한 현실 직시해야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 펜타곤의 스티브 파인버그 CFO /EPA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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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아연의 미 제련소 투자 방식을 보며, 미국의 정체성이 바뀌었음을 실감하게 된다. 이 사업은 고려아연이 제련소를 소유·운영하되, 미국 국방부가 최대 주주인 합작 법인이 민원 해결사를 맡고 고려아연 지분까지 확보하는 전례 없는 구조로 짜였다. 미국 정부가 동맹국 기업을 자신들의 자산으로 관리하는 거대 사모펀드(PEF)처럼 행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그림을 그린 건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과 스티브 파인버그 국방부 부장관 등 월스트리트 투자은행 출신 관료들이다.
러트닉 장관은 한미 관세 협상 때 “지금의 한국을 만든 건 미국이다. 이제 한국이 미국을 도와야 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고 한다. 이제 보니 단지 외교적 수사가 아니었다. 러트닉이 보기엔, 과거 미국은 안보 우산과 시장 개방이란 형태로 한국에 초기 투자(Seed Funding)를 했다. 한국은 산업화에 성공했고, 글로벌 기업들을 키워냈다. 이제 미국은 자국 제조업 재건을 위해 막대한 자본이 필요하다. 러트닉의 말은 미국이라는 사모펀드가 투자 약정자(한국)에게 “이제 입금하라”는 통보였던 셈이다. 쌀도 소고기도 아닌 대미 투자펀드가 한미 관세협상의 처음이자 끝이었던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과거에도 미 정부엔 로버트 루빈이나 헨리 폴슨 같은 월가 출신 장관들이 있었다. 하지만 트럼프 시대 미국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미국의 통상·산업정책을 두고 ‘효율과 자유무역을 앞세워 글로벌 시장을 키우던 시대가 끝나고, 안보와 지정학을 앞세워 공급망과 산업 가치를 관리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진단했다. FT는 반도체법(CHIPS Act)의 초과이익 환수 조항, 전략 자원 기업에 대한 정부의 지분 투자, 보조금과 관세를 결합한 압박 방식을 사례로 들며, 미국 정부가 더 이상 중립적인 ‘시장 조성자’에 머물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FT는 이런 변화가 일시적 정책이 아니라, 미국의 대외 경제 전략 자체가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사모펀드의 문법으로 보면, 미국 정부의 거침없는 행보가 비로소 이해된다. 미 상무부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1급 기밀인 수율 데이터와 고객사 정보 제출을 요구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는 동맹국 정부 간 협조 요청이라기보다, 사모펀드가 피투자사 리스크를 점검하겠다며 실시하는 고강도 실사에 가깝다.
관세도 마찬가지다. 투자자가 약정을 이행하지 않을 때 사모펀드가 부과하는 위약금처럼, 트럼프의 관세는 동맹국에 자본 납입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기능하고 있다. 미국은 재정 부담을 최소화한 채 동맹국 기업의 자본을 끌어들여 공장을 짓게 하고, 반도체법 등을 통해 기술 통제권과 공급망 주도권을 가져간다. 남의 돈으로 기업을 사들이는 사모펀드의 차입 매수 기법을 국가 차원에서 하고 있는 셈이다. 이게 트럼프 정권만의 특징일까. 민주당의 바이든은 보조금이라는 당근을, 공화당의 트럼프는 관세라는 채찍을 들었을 뿐, 동맹국의 자본과 기술을 활용해 미국 제조업을 살린다는 목표는 놀라울 정도로 일관된다.
미국의 제조업 부활 시나리오는 한국의 반도체, 조선, 제련 기술 없이는 완성될 수 없다. 고려아연 방식으로 미국이 투자하기를 원하는 한국 기업이 또 있다고 한다. 고려아연의 성과는 긍정적이지만, 미국만 이익을 챙기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시각도 있다. 냉혹한 머니게임의 판을 읽지 못하고 ‘동맹’과 ‘신뢰’라는 도덕적 어휘로만 미국을 상대한다면, 우리는 불리한 계약서에 서명하고 청구서만 떠안게 될지도 모른다. 그 현실을 직시하는 것에서부터, 새로운 통상 전략은 시작돼야 한다.
[이길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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