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2.21 (일)

    우리 바이오·제약 업계에 CIEO를 제안한다 [김선영의 K-바이오 인사이트]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편집자주

    새로운 '먹거리 산업'으로 거론되지만, 불확실성도 여전한 한국 바이오 산업. 바이오 분야 '1호 교수 창업자'이자, 지난 27년간 글로벌 수준의 과제에서 성패와 영욕을 경험한 김선영 교수가 우리 산업 생태계의 이슈와 문제점을 진단하고 세계 진출 방안을 모색한다.


    핵심 연구는 내부, 정형화된 개발은 외부에
    Core-In/ Enabling-Out, '핵내보외' 전략
    비용과 시간은 줄이면서 경쟁력을 높인다


    한국일보

    ⓒ게티이미지뱅크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2000년대 들어,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글로벌 제약산업은 신약개발 생산성 저하와 비용 증가라는 구조적 문제에 직면했다. 여기에 빅파마들의 대형 인수합병 이후 비핵심 파이프라인 정리가 이어지면서, 이른바 'NRDO 모델'(No Research, Development Only)이 등장했다. 신약 후보물질은 외부에서 도입하고, 기업은 임상과 개발에 역량을 집중하겠다는 발상이다.

    이 개념이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2010년대 중후반이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당시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연구 없이 어떻게 개발을 하나?"라는 근본적 의문이 지배적이었다. 글로벌에서 NRDO 성공사례로 거론되는 경우는 제한적이고, 국내에서도 그 모델이 보편적으로 검증됐다고 말할 만한 사례를 찾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최근 글로벌 제약·바이오 산업을 둘러싼 인프라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했다. 임상시험을 관리하는 CRO(Contract Research Orgarnization), 생산을 대행하는 CMO
    (Contract Manufacturing Organization), 공정 개발과 생산을 함께 수행하는 CDMO를 넘어, 이제는 연구까지 포괄하는 CRDMO 모델까지 등장했다. 신약개발 전 과정에서 아웃소싱과 파트너링의 선택지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 변화의 중심에는 중국이 있다. 우시앱텍(WuXi AppTec), 우시바이오로직스(WuXi Biologics) 등의 기업들은 연구·개발·제조를 아우르는 통합 서비스 플랫폼을 전면에 내세우며 다국적 제약사의 핵심 파트너로 자리 잡았다. 불과 20년 전까지만 해도 값싼 인건비를 앞세워 ‘세계의 공장’으로 인식되었던 중국이, 이제는 글로벌 신약개발의 중요한 연구 허브로 평가받고 있다.

    이들 중국 위탁연구·생산 기업의 약진은 중국 바이오제약 산업 전반에도 긍정적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중국 과학자들이 아이디어를 도출하고 기초 실험을 수행한 뒤, 이후 개발 과정을 전문 위탁기업에 맡기면서 과거 3~5년 걸리던 일을 1~2년 내 마무리하는 사례가 늘었다. 그 결과 중국 바이오벤처들은 글로벌 제약사를 상대로 놀라운 수준의 기술이전 성과를 거두며 단기간에 존재감을 키웠다.

    이러한 흐름은 우리나라 바이오·제약 업계와 정책 당국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한국은 높은 생활비와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 등으로 연구 인력 비용이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 젊은 연구자 세대는 과거처럼 밤을 새우며 실험실에 매달리는 문화를 더 이상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워라밸은 사회 전반의 표준이 되었고, 연구 현장 역시 예외가 아니다. 반복적이고 시간·노동 집약적인 연구 과정을 기업 내부에서 모두 소화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비용과 시간 부담이 과도해진 것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여기서 제안하고 싶은 개념이 바로 CIEO(Core-In/Enabling-Out) 모델이다. 이는 NRDO의 극단적 발상을 수정·보완한 보다 현실적인 접근법이다. 특허와 독창적 플랫폼 기술을 창출하는 핵심 연구(Core)는 내부에서 수행하되, 그 성과를 구현하고 확장하는 데 필요한 표준화되고 재현 가능한 과정(Enabling)은 외부 전문기관에 맡기는 것이다. 한자로는 '핵내보외(核內輔外)'라 정의할 수 있다. 핵심 연구는 내부에서 하고, 상용화에 필수적이지만 정형화된 개발 과정은 외부에 맡기자는 의미다.

    예컨대 새로운 타깃 발굴, 후보물질의 새로운 작용기전 규명, 초기 유효성 증명, 핵심분석법, 플랫폼 기반 구축 등은 내부 연구진이 담당한다. 반면 독성시험, 반복적 전임상 동물실험, 제조처럼 정형화되어 있는 개발과정은 전문 위탁업체에 맡길 수 있다. 이를 통해 기업은 한정된 인적·재정 자원을 고부가가치 지적재산 (IP) 창출에 집중하면서도, 전체 개발 속도를 크게 높일 수 있다.

    물론 중국 위탁기업을 신뢰할 수 없다는 구시대적 우려와, "연구는 끝까지 우리가 움켜쥐어야 한다"는 소유 본능도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중국 정부와 기업들은 글로벌 협력에 있어 규정 준수와 투명성 확보가 선택이 아닌 필수이며, 이를 위반할 경우 생존 자체가 어려워진다는 점을 잘 인식하고 있다.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를 찾는 일은 국내든 해외든 마찬가지로 어렵고 중요한 과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전략적 선택이다. 모든 것을 내부에서 해결하려는 집착은 자원 낭비를 초래하고 개발 속도를 늦춘다. 반대로 모든 연구를 외부에 맡기는 것은 IP 상실에 대한 불안과 기업 정체성의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CIEO는 이 두 극단을 넘어서는 제3의 길이다. 핵심적인 창의성과 고부가 지식재산은 내부에 지키되, 실행을 가능하게 하는 정형화된 과정은 외부 전문 네트워크와 협력하자는 것이다.

    지금 우리 바이오·제약 산업은 글로벌 경쟁 속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 기로에 서 있다. 인건비와 연구 환경은 더 이상 기업에 우호적이지 않으며, 기존 방식만으로는 세계 무대에서 살아남기 어렵다. CIEO, 즉 '핵내보외' 전략은 NRDO의 한계를 보완하면서도 한국 바이오·제약 기업이 직면한 인력 및 비용 구조의 제약을 넘어설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작금의 글로벌 변화는 우리 바이오·제약 산업에 발상과 전략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일보

    김선영 서울대 생명과학부 명예교수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