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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9 (금)

    [장미란의 무게여 안녕] 꽃꽂이하고 상상하며 ‘무거운 오늘’을 번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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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일러스트=이철원


    나는 꽃을 아주 좋아한다. 꽃꽂이는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취미 중 하나다. 선수 시절에 몸과 마음의 피로를 꽃꽂이로 풀곤 했는데, 시상식을 할 때면 다른 선수들의 꽃다발까지 수거해 와서 종류별로 모았고, 음료수 병에 꽂아 역도장과 동료들 방에 배달하기도 했다. 그렇게 다시 태어난 꽃들은 저마다 향기와 아름다움을 뽐내며 선수들에게 좋은 에너지를 주었다.

    지금은 주기적으로 꽃을 산다. 연구실에서 강의 준비를 하다 진도가 안 나갈 땐 곧장 꽃집으로 향한다. 꽃을 보면 심란하던 마음이 정화되고 차분해진다. 하얗고 노란 꽃들은 나를 위로해 주고, 핑크와 보라색 꽃들은 마음을 설레게 하며, 빨간 꽃들은 매우 강렬해 곧 역기 들러 뛰어 나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도 나는 꽃집으로 달려가 예쁜 꽃들을 가지고 연구실로 돌아온다. 폭발 직전의 전쟁터 같던 연구실도 꽃을 꽂아놓고 보면 핑크빛 세상이 돼 있다.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고, 시도해 볼 용기가 생긴다. 그렇게 꽃을 화병에 꽂고 노래를 들으며 차를 한 잔 마시면 다시 집중할 힘을 얻게 된다.

    마냥 참으며 할 수만은 없는 일이 많기에 나를 위한 무기들을 더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 무기들은 보통 시간과 돈이 들지만 차분히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예를 들면 꽃은 시간과 돈이 함께 드는 일이다. 여유가 된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시간과 돈이 없을 때를 위해 나는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나만의 무기를 매일 찾고 있다. 학교 뒤에 있는 산에 산책을 갈 땐 시간만 있으면 되고, 연구실에 앉아 오래 고민한 물건을 클릭하는 일 역시 돈의 여유가 허락될 때 마음을 환기하는 나만의 무기다.

    내가 무엇을 하면 기분이 나아지는지 아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좋지 않은 일을 겪었을 때 상황에 따라 맞는 무기를 쓰면 얼마나 좋을까? 기분이 안 좋을 때 그것을 뛰어넘는 인상적인 사건들을 겪지 않으면 계속 기분이 안 좋은 상태로 있게 된다고 어느 책에서 읽었다. 좋지 않은 감정에서 빨리 빠져나오려면 노력을 해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해 주겠지, 하고 별 노력을 하지 않던 때는 좋지 않은 상태가 오래갔다. 이제는 가지고 있는 무기들을 사용하며 부정적인 감정들을 빨리 떨쳐낼 수 있는 실력이 생겼는데, 그런 노력들을 반복하다 보니 시간을 아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시간도 돈도 허락되지 않을 땐 제일 좋아하는 노래를 틀고는 눈을 감고 노랫말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예를 들어 ‘Spring Waltz’ 같은 노래를. 바람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여인이 하늘하늘 드레스를 입고 토슈즈를 신은 발을 살포시 내디디며 왈츠를 춘다. 사람들이 박수와 환호성을 보내면 우아한 자태로 화답한다. 그리고 그녀는 빙글빙글 현실 속으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는다. 넉넉하고 편한 옷차림에 육중한 몸으로 다리를 올렸다 내렸다 낑낑대면서. 이것이 내 모습이다. 머리카락은 가라앉아 있고 얼굴은 또 왜 이렇게 시커먼지. 군용 위장 크림을 바른 듯한 내 얼굴을 보며 전쟁터 같은 연구실에 엎드려 각개전투 자세도 취해 본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화들짝 놀라고 웃음이 쏟아지기도 한다.

    나는 상상을 아주 많이 한다. 정신 승리에서 오는 알 수 없는 쾌감이 나를 기분 좋게 한다. 혼자 생각하는 것이니 뭘 하든 어떠한가.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한바탕 전쟁을 치른 듯하지만 나의 전쟁터에는 비극과 기근 대신 꽃과 간식이 넘친다. 나는 상상 속에서 하루하루를 그렇게 견디고 승리하며 오늘을 버틴다.

    학기가 시작되면 학생들에게 물어본다. “너는 무엇을 하면 행복해지니?” 어른들에게도 종종 여쭤보는데 선뜻 대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오히려 내게 되묻는다. 그럼 내 무기를 주욱 늘어놓는다. “저는요, 시를 읽으면 시의 말처럼 내 마음이 예뻐지는 것 같아서 좋고요, 더운 여름날 시원한 수박을 먹으면 세상에서 부러운 게 없어요, 그리고 아주 추운 날엔 뜨끈한 온탕에 몸을 녹이고 향기 좋은 바디로션을 바르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요.” 그러면 “맞아! 나도 그래, 맞아” 하신다. 이미 가진 무기가 많은데 그것을 모르는 것 같다.

    조선일보

    장미란(당시 25세)이 2008 베이징올림픽 여자 역도 최중량급에서 인상 140㎏을 번쩍 든 모습. 장미란은 합계 326㎏(인상 140㎏, 용상 186㎏)을 들어 올려 세계신기록으로 금메달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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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매일 맞는 오늘을 참 힘겹게 살아간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애를 쓴다. 돈을 열심히 모으고 경력도 부지런히 쌓는다. 내 계획대로 잘되면 인생이 성공한 것 같지만 실패가 반복되면 노력이 헛되게 느껴진다. 그 뒤에 오는 공허함이 내 존재의 이유를 무가치하게 만든다.

    그럼 무엇이 유익한 걸까?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걸까? 명쾌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가 않다. 안개가 자욱한 길 위에 서 있다고 생각하니 털썩 주저앉고 싶다. 멀리 바라볼수록 인생이 까마득하고 지난 시간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이럴 땐 모든 것을 싹 지워버린다. 생각도 계획도 비우고 오늘 내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에 집중한다. 가진 게 없다는 사실은 서글플 수 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내 삶을 새롭게 만들고 채울 바탕이 될 수도 있다. 그 희망이 나를 움직인다. 성공은 성공이 아니고 실패는 실패가 아니다. 성공에는 기쁨이 있지만 실패에는 유익이 있다. 잘못 선택한 것이 나쁘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그 경험이 앞으로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기 때문이다.

    한 해를 돌아보면 잘한 일도 있지만 잊고 싶은 일도 꽤 있을 것이다. 잘 지웠으면 좋겠다. 그리고 성공과 실패를 모두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다시 시작하면 좋겠다. 나를 지키는 실력을 차근차근 쌓아가며 각자의 무기로 자신을 지키고 돌보며 살아가면 좋겠다. 한 송이씩, 한 곡씩, 그리고 한 걸음씩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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