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2.19 (금)

    [동서남북] 대북 라디오 ‘일본의 바람’은 멈추지 않는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北 주민과 납북 일본인 위해

    18년째 매일 30분 라디오 전파

    트럼프·이재명 따르지 말고

    희망의 방송 계속 이어갔으면

    조선일보

    /유튜브 캡처일본 정부가 지난 13일 젊은 세대들에게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만든 동영상에서 소개되고 있는 요코타 메구미. 열 세살 때 니가타현에서 하교 중 납북돼, 납북문제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일본 정부가 전해드리는 ‘일본의 바람’입니다. 저희 방송은 납치 문제를 중심으로 일본과 북조선 관련 뉴스, 일본의 현재 모습과 일본 음악을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북한을 가청권역으로 매일 밤 방송되는 30분짜리 단파 라디오 프로 ‘일본의 바람’ 오프닝이다. 2007년 7월 첫 방송 이후 변함없는 포맷으로 전파를 탄다.

    국제부 특성상 한국어 서비스가 있는 외국 국·공영 라디오 방송을 자주 듣는다. 미국 VOA와 RFA, 일본 NHK, 대만 RTI, 베트남 VOV, 영국 BBC 등이 한국어 방송을 내보낸다. ‘일본의 바람’은 그 중에서도 유별나다. 대다수 채널이 남북한 주민을 포괄적 청취자로 상정하지만, 이 방송은 대북(對北) 방송 정체성을 확실히 드러낸다. 오프닝 멘트가 없으면 ‘조선중앙텔레비죤’ 뉴스로 착각하기 쉽다. 일본에 정착한 탈북민이나 전향한 조총련계가 진행자가 아닐까 추측한다.

    다른 방송들과 달리 ‘일본의 바람’은 일주일 내내 같은 내용을 내보낸다. 1970~80년대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피해자 이슈 비중이 커 차분하고 무겁다. 이 방송을 요즘 부쩍 달리 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재집권한 뒤 국무부를 초토화하면서 대북 방송 역사가 깊은 VOA와 RFA는 송출이 중단됐다. 6월 출범한 이재명 정부는 비무장지대 확성기를 걷어내고 과거 좌파 정부에서도 멈추지 않던 군 대북 방송마저 끊었다.

    일본도 새 정부가 들어섰지만 ‘일본의 바람’은 멈추지 않았다. 이 방송이 북한 가정에 수신된다면, 파급 효과는 상당할 것이다. 자기 나라를 ‘북한’이 아닌 ‘북조선’이라 부르는 익숙한 말투에 귀가 솔깃하지 않겠나. 최신 방송 내용은 이렇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와 기하라 미노루 관방장관이 납북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실종자 가족과 만난 소식이 전파를 탔다. 재일(在日) 탈북민이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열린 미국 수제 맥주 축제에서 고기겹빵(핫도그)을 즐긴 이야기와 90년대 J팝까지 들려준다.

    클로징 멘트도 한결같다. 1978년 모녀가 납북돼 딸만 2002년 풀려나고 남은 소가 미요시(93) 등 납북자 12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반드시 일본으로 데려가겠다”고 다짐한다. 이 프로의 일본어 버전인 ‘후루사토노 카제(고향의 바람)’도 있다. 전원 생존해 있다고 해도 12명만을 위한 방송인 셈이다.

    ‘일본의 바람’은 같은 사안을 대하는 한·일의 극명한 온도 차를 보여주는 사례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달 초 외신 기자회견에서 북한 억류 국민 6명에 관한 질문에 “처음 듣는 얘기”라고 했다. 통일부는 1953년 휴전 후 납북 국민이 이들을 포함해 최소 522명이라고 집계한다. 가족들이 기다리는 6·25 전시 납북자와 미송환 국군포로 추정자까지 합치면 18만명이 넘는다.

    한국에서 그들의 존재가 잊히는 동안, 현해탄 건너에서는 단 12명의 피해자를 잊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일본 정부는 지난 13일 젊은 세대 눈높이에 맞춰 일본인 납북 개요와 이를 부인하는 북한 주장을 반박하는 35분짜리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다. 지난달 초 납북자 가족이 주최한 송환 촉구 국민대집회에는 다카이치 총리와 기하라 장관이 참석했다. 바람은 열도 안팎에서 모두 불고 있다.

    이 대통령이 대화 러브콜을 보내는 북한 김정은은 지난 8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동원됐다 전사한 군인들 영정 앞에 고개 숙이고 유족들을 위로했다. 자신이 징발하지 않았다면 멀쩡히 살아 있을 청년들이다. 국가 존재 이유와 지도자의 역할에 대한 회의감이 밀려오는 때다. 그래도 희망의 소리인 ‘일본의 바람’은 오늘도 북녘의 밤하늘을 가로지른다.

    [정지섭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