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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21 (일)

    이슈 끊이지 않는 학교 폭력

    “3기엔 목포형무소 탈옥사건과 1·4후퇴 학살 꼭 규명했으면” [안녕 진화위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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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

    박정근 진실화해위 조사3과 조사관이 16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 6층 정원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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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은 작별이자 환영의 인사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의 국가폭력 사건을 조사해온 독립기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또는 진화위)가 분기점을 맞는다. 5년간 활동해온 제2기는 11월26일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국회는 제3기 탄생을 위한 법안 통과를 준비 중이다. 3기 설립은 이재명 대통령의 공약이었다. 한겨레는 2기를 돌아보고 3기를 바라보며 ‘안녕 진화위’를 시작한다.

    ‘진화위’는 그동안 부정적 뉴스로 자주 등장했다. 내란 옹호 논란이나 설립취지에 반하는 발언으로 시끄러웠던 몇몇 위원장과 국회에 나와서도 마스크를 벗지 않는 기행을 벌인 국정원 출신 간부 탓이었다. 부정기 연재될 ‘안녕 진화위’는 그동안 조명되지 못한 얼굴과 목소리를 찾아 나선다. 과거사 조사와 규명에 진심을 가진 이들의 이야기와 함께 3기로 가는 여정의 의지와 기대를 담아본다.

    굿바이 진화위! 헬로 진화위!!

    “할아버지가 한국전쟁 당시 서울에서 국민학교(초등학교)를 다니다가 피난을 가셨는데, 당시 길가에 총살된 시체가 너무 많았다고 자주 이야기해주셨어요. 그때마다 우셨지요.”

    그는 할아버지 이야기를 귀담아듣는 어린이였다. 전북 완주군에 살았던 외할아버지는 중학생 시절 황방산에서 전주형무소 재소자 학살을 목격했다고 한다. 외증조할아버지는 인민군 점령기에 우익으로 지목되어 연행·감금됐으나 가까스로 생존했다. 나중에 커서 할아버지들이 보았다는 그 주검들의 진실을 규명하는 조사관이 될 줄은 몰랐다. 할아버지가 말한 도로변 주검이 서울 지역 형무소 재소자들이었을 거라는 추정도 하게 됐다.

    진실화해위 조사1국 조사3과에서 형무소 사건을 전담했던 박정근(32) 조사관을 지난 16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형무소 사건이란 한국전쟁 전후 전국 21곳의 형무소(현 교도소)에서 재소자들이 군경에 의해 집단학살된 일을 말한다. 다만 난해한 쟁점이 많다. 가령 국민보도연맹원으로 형무소에 수감됐다가 군경에 의해 학살됐다면 국민보도연맹사건인가, 형무소 사건인가. 병사와 고문사는 어떻게 봐야 하는가. 탈옥 또는 일시석방 기록이 있는 사람은 진실규명(피해 확인) 대상인가?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로 군법회의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죽은 경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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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9월23일 헌병들이 대전형무소 재소자들을 대전 산내면 골령골로 끌고 가 학살한 현장 사진. 민간 청년단원들이 구덩이의 주검들을 정리하고 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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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무소 사건은 방대하기까지 하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에만 전국 형무소에 5만여명의 재소자가 있었다. 놀랍게도 이들 중 절반 넘는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2기 진실화해위에서 형무소 사건 전담자는 긴 시간 동안 박 조사관 달랑 혼자였다. 폐쇄된 형무소 공간에서 벌어진 일이라, 사건 내용을 인지하고 ‘형무소 사건’이라 신청하는 이가 드물었다. 정확한 신청 건수도 파악되지 않았다. 일부 간부들은 이 사건 피해자들이 법원 또는 군법회의에서 ‘확정판결’을 받았다며 적대감도 드러냈다. 전체 진실규명률은 50% 이하로 쪼그라들었다. 총체적 난국 속에서 박 조사관이 진실규명한 사건은 135건이다.

    박정근 조사관은 형무소 사건에 대해 “한마디로 나치 절멸수용소와 같았다”고 말했다. 전국적으로 체계적인 대량학살이 자행되었다는 뜻이다. 그는 2기에서의 여러 아쉬움을 전하며 “3기에서는 목포형무소 탈옥사건과 1·4후퇴 전후의 학살 사건이 꼭 진실규명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는데, 그 내용은 자못 충격적이었다.

    박정근 조사관은 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한 뒤 2022년 6월 진실화해위에 합류했다. 석사 과정에서는 1950년대 한국-튀르키예 관계로 논문을 썼고, 박사 과정에서는 한국-중동 관계사를 연구했다. 중동 문제를 연구하느라 대학원에서는 터키어를 익혀야 했는데, 진실화해위에 와서는 형무소 행형기록에 담긴 한자 손글씨를 해독하느라 진땀을 뺐다. 정규과정에서 한자를 배우지 않았으나, 기록을 오래 들여다보니 익숙해졌다고 한다. 3기 출범을 앞둔 지금은 박사과정에 전념할지, 2기에서 못다 한 조사를 더 할지 고민 중이다. 다음은 일문일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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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2일 강원대 춘천캠퍼스 사회과학대학 대강의실에서 열린 ‘2025년 과거사 연구자·활동가 대회’에서 박정근 조사관(왼쪽)이 ‘2기 진실화해위원회의 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 조사와 한계’를 주제로 발표를 하고 있다. 임재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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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형무소 사건 피해자들은 보도연맹사건과 예비검속 사건으로 분류되기도 하잖아요. 두 가지를 구분해서 정리해주신다면.

    “2기 진실화해위에서는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 발발 시점에 형무소에 이미 입소해 있던 재소자들은 형무소 사건으로, 그 이후 형무소에 국민보도연맹 또는 예비검속으로 구금된 이들은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분류했습니다. 그런데 신청인뿐만 아니라 위원회 안에서도 이를 혼동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어요. 조사 과정에서 유형이 바뀌는 사건도 많았고요. 기록과 정황을 보아 형무소 사건 쪽에 더 가까운데 국민보도연맹 사건이라고 신청인과 참고인이 완강하게 주장하는 사례도 있었어요. 또 한국전쟁 발발 전 형무소는 아니지만, 경찰서 및 헌병대 유치장에 구금되어 있던 진실규명 대상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 역시 한국전쟁 발발 후 국민보도연맹 사건이든 형무소 사건이든 휘말려서 학살된 것은 마찬가지인데, 이분법적 분류로 대부분 진실규명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 1945년부터 전국 각지의 형무소는 지옥처럼 느껴져요.

    “1945년 미군정 수립부터 1950년대에 이르는 동안 전국 형무소에서 최소 7000명의 재소자가 고문 등 가혹 행위와 과밀 수용, 식량·의약품 부족 등 열악한 환경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통계가 있어요. 재소자들이 너무 많았어요. 특히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으로 사상범이 급증해서 모든 형무소가 정원을 두 배 이상 초과했어요. 국민보도연맹도 이렇게 넘쳐나는 사상범들을 도저히 모두 형무소에 수감할 수 없었던 상황 속에서 조직됐습니다. 당시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가 너무 많은 반대파를 죄인으로 몰았고, 이것이 형무소의 열악한 환경으로 이어졌습니다. 동시에 이들을 너무 두려워했기에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는 직접 죽이려 했고요. 한국전쟁 전후의 폭력을 ‘국민 만들기’로 해석하는 연구들이 많은데, 비국민은 형무소에서 절멸돼야 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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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기 진실화해위에서 골령골에서 학살됐다고 진실규명된 후 군법회의 사형 판결문이 발견돼 진실규명이 취소된 백락정의 사진. 이후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사건은 진실규명이 불가능해졌다.백락정의 젊은 시절 사진. 유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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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기에서는 형무소에서 군법회의 판결을 받고 죽은 사람들도 진실규명을 해주었죠.

    “2기에서도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사건 일부가 형무소 사건으로 진실규명된 적 있어요. 군법회의 절차를 불법으로 본 거죠. 마산형무소 재소자 희생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그런데 골령골에서 학살됐다고 진실규명된 후 군법회의 사형 판결문이 발견돼 진실규명이 취소된 ‘백락정 사건’ 이후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사건은 진실규명이 불가능해졌습니다. 보통 한국전쟁 때 불법적인 학살 사실뿐 아니라, 불법적인 군법회의 사실까지 드러나면 유족들은 국가를 대상으로 소송을 두 번 진행할 수 있어요. 학살과 군법회의에 대한 소송을 따로 진행해 배상도 보통 두 배로 받았어요. 그런데 거꾸로 2기에서는 적법하게 죽은 사람이라는 논리가 만들어진 거죠. 백락정 사건 신청한 유족분은 최초 진실규명 당시 ‘악질 부역’ 기록 때문에 위원장을 고소했던 분이에요.”

    ― 찍힌 측면도 있겠네요.

    “간부들이 모든 사건을 꼼꼼하게 살펴보지는 않는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상대적으로 조사가 깊게 되지 않아도 진실규명되는 사건이 있어요. 반면 간부들에게 ‘찍힌’ 사건은 까다로운 통과 절차를 거칩니다. 백락정 유족뿐 아니라 백락정 사건의 첫 담당 조사관도 간부들의 사적인 감정으로 인하여 찍힌 정황이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악질 부역’ 기록이 발견, 인용되었던 거로 알아요.

    이후 백락정의 군법회의 판결문이 발견되었는데, 당시 담당 간부가 방방 뛰며 기뻐하던 모습이 눈에 선해요. 이건 너무 부끄러운 이야기죠. 이 분은 원래 전체 형무소 사건에 대해서도 ‘확정 사건’이라며 각하를 주장하던 간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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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락정의 사형판결문. 판결 이유가 공란으로 비어 있다. 이 판결문 발견 뒤 2기 진실화해위에서 백락정의 진실규명이 취소됐다. 유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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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제부터 형무소 사건 진실규명이 어려워졌을까요?

    “1기 진실화해위 막바지부터라고 볼 수 있어요. 1기에서 처음 나온 ‘부산·경남지역 형무소 재소자 희생 사건’ 보고서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 학살 사건을 중심으로 해 형무소 사건을 상세하게 밝혔어요. 1·4후퇴 전후 학살사건과 고문사, 병사 등 옥사 사건, 그리고 군법회의 사형 사건도 진실규명했고요. 근데 이영조 위원장이 취임하고 1기 위원회가 보수화된 뒤부터 참고인과 기록에 대한 집착이 심해졌습니다. 그 결과 마지막 보고서인 전라도 및 중부지역 형무소 보고서는 진실규명률이 급감했죠. 고문사와 1·4후퇴 전후 학살은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2기에서는 이런 기조에서 더 나아가 간부들이 형무소 사건 전체를 각하하자는 주장을 할 정도였어요. ‘징역 10년형 이상 받고 죽은 사람은 통과될 생각 마라’ ‘옥사 사건은 집단희생 사건이 아니다’ 등의 주장이 나왔죠.”

    ― 1·2기에서 진실규명되지 않은 사건 중에 목포 형무소 탈옥사건과 1·4후퇴 학살을 이야기했어요.

    “목포형무소 사건은 1949년 9월14일 벌어진 일입니다. 당시 여순사건으로 수감된 군인 재소자들이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이들이 형무관(교도관)의 무기를 빼앗고 탈옥을 시도했어요. 군경이 진압에 나섰는데, 그 과정에서 형무관 6명과 재소자 400여 명이 사망했습니다. 또 목포 인근의 한센인이 학살되기도 했죠. 당시 군경은 저항하는 탈옥수뿐만 아니라 감방문이 열려 있었던 재소자들을 사살했어요. 경찰서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던 탈옥수도 사살했습니다. 한국전쟁 발발 후 전국 형무소에서 전개된 무법적인 학살의 전사로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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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6월29일 수원역 앞으로 이송된 인천형무소 재소자들. 인천형무소는 한국전쟁 발발 후 정치·사상범을 석방하지 않고 영등포형무소 수원농장으로 이송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사진촬영자는 기록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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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 이건 1·2기에서 진실규명이 안 됐죠?

    “목포형무소 탈옥사건은 1기에서 아예 불능 처리됐어요. 먼저 나온 부산·경남 형무소 보고서에서도 탈옥 사건은 다 각하됐거든요. 목포 탈옥 사건 이후 탈옥수를 죽여도 된다는 법이 1950년 3월에 제정되거든요. 구일본법에 탈옥수가 저항하면 사살해도 된다는 조항이 있었다고 해요. 1기에서 마산형무소 탈옥 사건(1949년 11월)이 각하되었는데, 도주 중 검거에 저항하여 사살했고 조사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고 기재돼 있습니다. 그래도 1기 때 목포형무소 탈옥 사건을 상당히 자세하게 조사해두긴 했습니다. 신청인·참고인 진술도 다 받았고요. 각하가 아니라 불능으로 처리한 걸 보면 나름대로 고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 목포형무소 탈옥사건이 진실규명돼야 한다고 보나요?

    “여러 기록과 진술을 종합해보면, 탈옥 사건 당시 체계적으로 무기를 빼앗아 형무관을 죽인 탈옥수들은 군인 출신 재소자입니다. 또 당시 생존했으나 한국전쟁 때 학살된 진실규명 대상자의 신청인·참고인 진술에 따르면 감방문이 열린 사람들이 당시 모두 학살 대상이었다고 합니다. 감방문이 열리지 않은 사람들은 전쟁 발발 이후 죽었고요. 즉 군경이 탈옥 사건 당시 이를 주도하거나 형무관을 살해한 재소자에 대한 별다른 조사 없이 감방 밖에 있는 재소자를 모두 사살했고, 그 과정에서 경찰서에 체포되어 있던 재소자까지 살해하기도 한 거죠. 당시 국무회의에서 이승만이 탈옥사건을 두고 군경을 나무랐는데, 이렇듯 책임 소재를 피하기 위해 과격하게 진압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또 한 가지, 목포형무소 탈옥 사건 직후 법무부 장관이 국회에 출석해 형무소 내 열악한 상황이 탈옥의 원인이었다고 실토했습니다. 또 탈옥수라 하더라도 국민이 죽었다며 사과했고요. 다만 유족들에 대한 사과와 배상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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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근 진실화해위 조사3과 조사관이 16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 6층 카페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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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포형무소에서는 탈옥사건 이후 한국전쟁 시기에도 1000명 가까이 죽었다면서요.

    “재소자의 만기출소 여부를 적어놓은 ‘만기력부’를 보면 기결수만 750명이 죽었습니다. 미결수도 수백 명이었을 테고요. 1·4후퇴 때도 최소 200~300명이 죽은 것으로 보입니다. 목포에서는 해군 등이 경찰 경비선과 준설선에 재소자들을 태워 바다에 수장시켰어요. 일부는 목포형무소 뒷산에서 총살하기도 했고요. 부산·마산 형무소에서도 재소자를 수장한 경우가 많아요. 일부 주검은 바다를 따라 쓰시마섬까지 떠밀려갔습니다.”

    ― ‘탈옥’과 ‘일시석방’으로 기록돼도 진실규명 대상자로 볼 수 있나요?

    “목포형무소에서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 학살된 재소자에 대하여 앞서 언급한 ‘만기력부’에 ‘단기 4283년 7월22일 행형법 제15조에 의하여 일시석방’이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재소자 명단이 1951년 법무부에서 작성한 ‘6.25 당시 탈옥수 명부’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두 기록은 ‘일시석방’과 ‘탈옥’이라는 모순을 보입니다. 또 당시 형무관들은 이들 정치·사상범들은 한 명도 석방하지 않고 모두 학살했다고 일관되게 진술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기록들이 학살을 뜻한다는 것은 이미 1기에서 규명된 바 있어요. 사실 1950년 시행된 행형법 제15조의 ‘일시 석방’ 규정을 보면 ‘천재사변으로 인해 형무소 내에서 피난의 방법이 없다고 인정되는 때 등 일시석방할 수 있다’고 돼 있어요. 문제는 ‘24시간 내에 형무소 등으로 출두하지 않을 때에는 도주자로 처단된다’는 다음 규정이에요. 죽여놓고 탈옥수로 몰기 딱 좋은 거죠.

    특히 ‘탈옥’은 목포형무소 외 다른 전국 형무소에서도 발견되는 기록입니다. 경찰이 작성한 신원조회기록에서도 종종 발견되는데, 이는 거주지에서 멀리 떨어진 폐쇄적 장소에서 발생한 학살 사건을 경찰도 잘 파악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 때문에 일부 형무소 사건 유족들은 남파간첩 접선 대상으로 분류되어 고통받아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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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7월 대전 산내면 골령골에서 군인들이 보도연맹원을 학살하고 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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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후퇴시 형무소 학살도 진실규명이 잘 안 되었어요.

    “1·4후퇴 학살은 시기로는 1950년 9·28 수복 이후로부터 1951년 1·4후퇴에 이르기까지 깁니다. 9·28 수복 이후 부역 혐의를 받은 형무소 재소자가 급증했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이미 1·4후퇴 전부터 대규모로 처형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1·4후퇴가 임박하자, 전국 형무소에서는 6·25 직후와 유사하게 정치·사상범 재소자들을 대규모로 학살했습니다. 이 중에는 징역형을 선고받고 입소한 재소자들도 포함되어 있었고, 미결수도 다수였습니다. 6·25 직후와 달리 1·4후퇴기 학살의 특징으로는 부역 혐의 재소자를 대상으로 한 대규모 처형이 이미 전개되고 있었던 점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군법회의 판결과 같은 요식 행위가 더 많았습니다. 이게 간부들의 눈에는 적법한 처형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또 부역혐의자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6·25 직후보다 형무소 내부 상황이 더 열악했고, 겨울이 겹쳐 옥사하는 재소자가 많았어요.

    1·4후퇴기 학살은 1기 위원회에서도 3명만 진실규명 처리됐습니다. 다만 1기 위원회에서는 옥사자 56명을 진실규명하였는데 이들 대부분이 1·4후퇴기 사망자입니다. 1·4후퇴기 학살은 2기에서 형무소 사건으로는 한 건도 처리가 안 됐어요. 실제로는 형무소 사건인데 지역 부역 혐의 사건으로 통과된 적은 있을 겁니다.”

    ― 3기에서는 1.4 후퇴 직후 학살과 목포형무소 말고 또 뭘 더 조사해야 할까요?

    “인민군이 재소자 대부분을 석방했다고 알려진 개성·서대문·마포형무소 등에 대한 조사도 필요해 보입니다. 일부 재소자들은 인민군의 진격 이전에 학살됐음이 확인되지만, 인민군에 의해 석방된 재소자도 존재하는 상황에서 1기와 2기 위원회는 이들에 대한 판단을 보류했어요. 다만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사흘간 남진을 안 하는 사이, 삼남지방에 위치한 고향을 향하던 석방 재소자들은 대부분 한강을 건너 귀가하려다 군경의 검문에 걸려 학살됐습니다. 이들은 학살 뒤 그대로 유기됐어요. 저희 할아버지가 서울에서 피난을 나오며 봤다는 도로변 주검도 이들일 가능성이 있어요.

    또 옥사·고문사 등도 직권조사의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조사 중지된 형무소 사건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사건들이죠. 형무소 재소자들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음은 일상적인 가혹 행위와 과밀 수용, 식량 및 의약품 부족 등을 다룬 다양한 사료로 확인되는데, 2기에서는 ‘전쟁터에서 죽은 것도 아닌데’라는 논리로 무시되곤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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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8월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의 한 옥사에 독립운동가 사이의 암호통신인 ‘타벽 통보법’이 전시돼 있다. 이곳에서는 일제 강점기 때보다 해방 이후 더 많은 사람들이 고문당하고 죽었다. 최현수 기자 em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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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엔 일제강점기 이야기만 적혀있어요.

    “언제가 조사관들에게 ‘타임머신 타고 과거로 갔을 때 1940년부터 5년 사는 것보다 1945년부터 5년 사는 게 더 죽을 확률이 높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었어요. 한국전쟁 중 총살은 말할 것도 없고, 고문 등 가혹 행위와 식량, 의약품 부족도 해방 후가 더 심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서대문·대구 등 주요 형무소 터에 일제 때 탄압 사례만 주로 적혀 있어서 아쉽더라고요.”

    ― 형무소 사건을 다룬 문학작품은 별로 없는 듯요.

    “아내가 한강 작가의 작품을 좋아합니다.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에 대구형무소 재소자 학살 사건이 언급된다고 해서 그 부분만 읽어봤어요.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의 학살, 그리고 관련 기록 위조 등이 자세하게 서술돼 있어요. 김지하 작가의 회고록 ‘모로 누운 돌부처’에는 목포형무소 탈옥 사건 당시 친구 아버지가 사살당한 사실이 서술되어 있어 놀랐습니다. 그 외에 리영희 선생의 글에서 이런 구절을 봤습니다. ‘1964년 필화를 당해 교도소에 수감되니 무척이나 추웠는데 난방시설이 작동하지 않더라. 교도관에게 물어보니 식민지시기에 설치된 것인데 해방 이후 튼 적이 없다더라. 일본 제국주의자보다 같은 민족이 더 가혹하게 대우하더라.’”

    ― 가장 인상적인 신청인은 누구였을까요?

    “해방 직후 경남 고성의 인민위원회 시기를 아주 길게 기억하던 신청인입니다. 미군 진주까지 몇 달 남짓한 짧은 기간이었는데, 그때를 ‘좋은 시기’로서 무척 길게 기억하시고, 이후 아버지가 수년간 피신하던 시기를 아주 짧게 기억하십니다. 결국 아버지는 인민위원회 활동 혐의로 연행되어 고문을 받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는데, 면회 당시 아버지의 손발톱이 다 빠져 있고 너무 맞아서 옷이 살점에 엉겨 붙어 있어 말없이 눈물만 흘리다 왔다고 합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골령골에서 학살됐다는데 진주에서 연행되었기에 기록이 나오지 않아 조사 중지됐고, 신청인은 돌아가셨습니다.

    어릴 때 ‘내 생애의 아이들’이라는 소설을 읽었는데, 그와 비슷하게 ‘내 생애의 노인들’을 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조사관이 조사를 나온 사실만으로도 감격하여 병상에서 일어나 절을 하던 참고인, 기록이 나오지 않아 사실상 포기하고 있던 사건의 기록을 찾아 기쁜 마음에 전화를 드리니 통곡하시던 유족 회장님, 같은 상황에서 ‘다른 억울한 사람들도 많이 구제해주시라’고 문자를 주신 신청인, 보내드린 보고서를 읽고 나서야 아버지가 형무소에서 호명되어 학살지로 끌려가던 모습이 그려진다며 우시던 참고인 등이 기억에 남습니다. 결국 조사 중지된 신청인들도 많은데, 그분들께는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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