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2.21 (일)

    한·미 Z세대가 선호하는 ‘얼죽아’… 美에선 패션, 한국은 생존템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아무튼, 주말]

    [정재훈의 먹다가 궁금할 때] (4)

    세계 지도에 겨울철 커피 온도를 색칠해 본다면? 아마 빨갛게 물든 대륙들 사이에서 파랗게 빛나는 나라가 눈에 띌 것이다.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이스커피)의 나라’, 한국과 미국이다. 커피의 본고장 유럽에서 한겨울 얼음 든 커피를 마시는 건 커피에 대한 도발처럼 보일 수 있다. 여름이면 얼음 위로 커피를 바로 떨어뜨리는 ‘플래시 칠(flash chill)’ 커피를 즐겨 마시는 일본에서도 겨울 커피의 기본 값은 뜨거운 커피다.

    조선일보

    게티이미지뱅크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독 한국과 미국만은 영하의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스커피가 인기를 끈다. 2016~2023년 사이 미국 소비자의 차가운 커피(아이스·콜드브루·프라페 포함) 소비액은 2배 이상 늘었다. 최근 몇 년 미국 스타벅스에서도 겨울 분기 콜드 음료 비율이 60%를 웃돈다. 2022년 국내 주요 커피 체인 매장의 전체 음료 매출 가운데 76%가 아이스 음료였고, 스타벅스·폴바셋·할리스 등 대형 체인 대부분에서 겨울철 아이스 음료 비율이 60%를 넘는다. 강추위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따뜻한 아메리카노보다 10% 더 많이 팔릴 정도다.

    이쯤 되면 군사·경제 동맹을 넘어선 기묘한 얼음 동맹이다. 도대체 왜, 전 세계에서 이 두 나라는 계절을 거슬러 얼음을 선택하는 걸까.

    ◇젠지(Gen Z)가 쏘아 올린 얼음 공

    아이스커피 열풍의 출발점은 세대에 있다. 한국에서는 편의상 MZ세대라 통칭하지만, 엄밀히 말해 이 트렌드를 이끄는 축은 1990년대 중반 이후 태어난 Z세대(Gen Z)다. 지난해 미국 커피협회 설문조사에서 18~24세 성인의 45%가 전날 아이스커피를 마셨다고 답한 반면, 25~39세에서는 그 비율이 30%에 그쳤다. 미국과 한국의 Z세대에게 커피는 기성세대가 즐기던 따뜻한 휴식이나 사교의 도구가 아니다. 커피는 자신을 표현하는 소품이자, 즉각적인 에너지원이다.

    동시에 이 얼음 왕국은 기업들이 깔아 놓은 판이기도 하다. 시간을 거슬러 1990년대, 미국의 커피 업계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젊은 층이 씁쓸한 커피 대신 톡 쏘는 탄산음료를 아침 음료로 선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업계는 커피를 따뜻한 차의 영역에서 달콤하고 시원한 청량음료의 영역으로 이동시켰다. 2018년 미국의 던킨도너츠가 사명에서 ‘도너츠’를 떼어내고 음료 중심의 ‘던킨’으로 리브랜딩한 것은 이러한 흐름을 읽은 상징적 사건이었다.

    ◇미국은 패션, 한국은 생존

    겨울에도 아이스커피를 마신다는 면에서는 두 나라가 비슷하지만 그 속사정은 조금 다르다. 미국에서 아이스커피는 일종의 달콤한 간식이자 패션 아이템이다. 쓴맛을 싫어하는 미국 젊은 층에게 차가운 온도는 쓴맛을 가려주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그들은 얼음 위에 차가운 우유 거품을 얹고, 시럽이나 소스를 뿌려 자신만의 화려한 음료를 완성한다. 벤티 사이즈의 거대한 컵을 들고 다니는 것 자체가 ‘나는 쿨하다’는 표현이다.

    반면 한국의 얼죽아 세대에게 커피는 생존 연료이자 해소제에 가깝다. 한국인들이 선호하는 것은 화려한 프라푸치노보다 깔끔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다. 한국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가 커피 취향에도 반영된 셈이다. 점심시간은 짧고 일은 많다. 뜨거운 커피를 호호 불어가며 식힐 여유조차 없는 직장인들에게, 빨대를 꽂아 즉각적으로 카페인을 공급할 수 있는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템이다.

    조선일보

    추운 겨울에도 아이스 커피를 찾는 젠지. /틱톡


    ◇한번 길들이면 돌아가기 어려운 맛

    아이스커피 선호는 맛의 문제이기도 하다. 뜨거운 커피는 마실 타이밍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받자마자 마시면 입천장을 데기 쉽고, 마시기 딱 좋은 온도는 금방 사라진다. 반면 아이스커피는 바로 마실 수 있고 처음부터 끝까지 깔끔한 맛을 유지한다. 쓴맛과 텁텁한 뒷맛을 싫어하는 사람에게 차가운 온도는 커피의 향과 쓴맛을 부드럽게 눌러 주는 장점으로 작용한다. 우유와 시럽이 더해지면 쓴맛은 더 순해진다. 추운 겨울은 아이스커피를 즐기는 사람에게 오히려 최적의 계절이다. 바로 마실 수도 있지만 책상 위에 한 잔 올려 두고 하루 종일 조금씩 마시기에도 좋다.

    입맛이 한 번 아이스커피 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면, 다시 뜨거운 커피를 마시기 어려울 수 있다. 맛과 향이 훨씬 더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뜨거운 커피는 휘발성 향이 한꺼번에 피어오르고, 산미와 쓴맛이 전면에 튀어나온다. 하루 종일 은은한 배경 음악처럼 아이스커피를 마시던 사람에게는 향이 너무 세거나 맛이 직설적이라는 인상이 남기 쉽다. 얼죽아들이 이제는 ‘뜨아(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잘 못 마시겠다고 말하는 데에는 단순한 세대 취향을 넘어 맛을 느끼는 방식의 변화, 즉 감각의 재배선이 숨어 있다.

    여기에 카페인의 체감도 다르게 작용한다. 뜨거운 커피는 조금씩 식혀가며 천천히 마시게 되지만, 아이스커피는 벌컥벌컥 마시기 쉽다. 카페인은 온도와 무관하게 흡수되지만, 같은 양을 더 짧은 시간에 마시면 체감 효과는 빨라진다. 아이스커피를 마시면 각성이 더 빠르게 온다는 경험담의 상당수는 사실 온도보다 마시는 속도의 문제에 가깝다.

    ◇아이스커피, 건강에는 괜찮을까

    매년 겨울이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기사가 있다. “얼죽아는 빈혈의 증거”라거나 “위장에 치명적”이라는 식의 건강 염려 기사다. 그중에는 아이스커피 마시는 것을 영양가 없는 얼음을 강박적으로 씹어 먹는 빙식증(얼음 과식증)과 연결 짓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위장이 예민한 사람이 아니라면, 아이스커피가 뜨거운 커피보다 건강에 특별히 더 나쁘거나 좋은 것은 없다.

    사실 이런 건강에 대한 염려가 유럽·중국 등 다른 나라에서 겨울철 아이스커피의 인기가 덜한 이유일 수 있다. 오랫동안 체액설(질병이 체액의 불균형 때문에 생긴다는 이론)을 신봉한 유럽에서는 한때 얼음물 자체를 몸에 좋지 않다고 여겨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중국 역시 찬 음료가 기의 흐름을 방해한다고 믿어왔다. 지금은 사라진 믿음이지만, 찬 것은 몸에 안 좋다는 오래된 직관은 아직도 남아 있다. 한국과 미국의 젊은 세대는 그런 오래된 금기보다 현실적 편의성을 택한 셈이다.

    아이스의 세계로 넘어오면서 커피는 뜨거운 차의 카테고리에서 벗어났다. 이제 커피는 물이나 탄산음료처럼 언제 어디서나 들고 다니며 갈증을 해소하고 에너지를 채우는 전천후 음료로 확장됐다. 난방이 잘 된 실내에서 일하고, 빠른 각성을 원하고, 즉각적 만족을 추구하는 한, 이 얼음 동맹은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아이스커피 한 잔이 더 익숙한 세대가 커피 트렌드의 새로운 주인이니까.

    [정재훈 약사·푸드라이터]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