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센트&스토리] (4)
오렌지에 정향을 박은 포맨더. /게티이미지뱅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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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철 유럽 도시의 시장을 지나다 보면 오렌지와 계피, 바닐라가 섞인 따뜻하면서도 부드러운 냄새가 차가운 공기 속에서 조용히 피어오른다. 단순히 연말 분위기를 내려고 뿌린 게 아니다. 겨울을 견디기 위한 생존의 지혜이자 신앙의 상징이다. 실제 과학적 효과도 있다.
과거 유럽에서는 겨울에 가축을 집 안에 들였다. 가축을 보호하는 한편 동물들의 체온으로 실내 온도를 높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겨울에는 추위 탓에 환기를 덜 하게 마련. 집 안이 불쾌한 냄새로 가득할 수밖에 없었다. 유럽인들은 악취가 단순히 불쾌한 게 아니라 질병의 원인이라고 믿었다. 고대 의학의 ‘미아스마 이론’, 즉 나쁜 공기가 병을 만든다는 믿음이다.
그래서 향을 피웠다. 고대 로마에서는 겨울 축제 ‘사투르날리아’에서 오렌지껍질·몰약·계피를 태웠다. 오렌지는 당시 귀한 과일로 풍요의 상징이었고, 껍질을 태우면 상큼한 시트러스 오일이 빠르게 퍼져 악취를 잡았다. 몰약은 성경에도 등장할 만큼 신성하고 귀한 향료였으며, 계피는 몸을 따뜻하게 하는 향신료로 여겨졌다.
북유럽 사람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겨울을 견뎠다. 해가 몇 시간밖에 뜨지 않는 혹독한 계절, 시들지 않는 상록수 토막을 불에 태우며 태양의 귀환을 기도했다. 집안에서 솔잎·송진·몰약·유향을 태워 악운을 쫓고 곰팡이·습기를 줄이며 실내 공기를 정화했다.
중세 수도원에서는 유향·몰약·정향·소나무 수지를 섞어 피워 공기를 정화하고 기도하는 이들의 마음을 안정시켰다. 오렌지에 정향을 박은 포맨더는 전염병을 막는 부적처럼 쓰였는데, 오늘날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남아 있다. 18~19세기 빅토리아 시대 이후 오렌지·계피·솔잎·육두구·바닐라는 완전히 ‘크리스마스의 향’으로 자리 잡는다.
흥미로운 점은 과거 믿음이 과학적으로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계피·정향·몰약·유향은 항균 성분을 지녔다. 악취를 덮는 것을 넘어 악취의 근원인 미생물을 억제하고 분해하는 힘이 있다. 계피는 혈류를 자극하는 성분이 있어서 겨울철 체온 유지에 도움을 준다. 솔잎과 송진의 연기는 항균과 항곰팡이 효과가 있다.
겨울철 집 안 공기를 좋게 만들고 싶다면, 냄비에 물을 반만 채우고 얇게 썬 오렌지나 레몬, 계피 껍질 2개를 넣고 중불에서 20분간 끓인 다음 바닐라오일 몇 방울을 떨어뜨려 보자. 커튼에 스며들고 이불에 남은 향이 하루를 포근하게 감싸준다. 향에는 악취를 이기려는 생존의 본능, 몸과 마음을 위로하려는 인간의 노력, 빛을 기다리던 겨울의 기억이 담겨 있다. 한겨울 집을 향기로 채우는 것은 과거와 현재, 마음과 계절을 잇는 오래된 의식이다.
[오하니 조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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