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숙취 해소부터 미용까지
영양수액은 만병통치약?
인천의 한 정형외과 의원에 게시된 영양수액 할인 이벤트 광고 화면. /인터넷 커뮤니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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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여의도 직장인 김모(38)씨는 한 달에 두세 번, 점심시간에 회사 인근 병원을 찾는다. 영양 수액을 맞기 위해서다. 최근에는 기력이 떨어져 14만원짜리 ‘황제 수액’을 맞았다. “30분 맞았더니 몸 상태가 훨씬 가뿐해졌어요.” 김씨가 다니는 병원은 황제 수액에 아미노산과 비타민 등이 함유돼 피로 회복·활력 증진·면역력·항산화·신경통 등에 효과가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김씨는 “주말에 쉬어도 피로가 잘 풀리지 않을 때면 수액을 찾게 된다”고 말했다.
이렇듯 바쁜 일정 속에서 충분히 쉬기 어려운 직장인들에게 수액은 휴식과 영양, 운동을 대신하는 간편한 선택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최근 방송인 박나래가 이른바 ‘주사 이모’라고 불리는 여성으로부터 반복적으로 의료 서비스를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박씨를 둘러싼 불법성 논란이 커지는 가운데, 많은 이들에게 영양 수액·주사가 일상적 컨디션 관리 수단으로 소비되고 있는 현실도 주목받고 있다.
동네 병·의원에서 수액을 맞는 풍경은 낯설지 않다. 마늘 주사, 백옥 주사, 마이어스 칵테일 주사, 감기몸살 수액 등 이름도 각양각색. 생리식염수, 포도당, 필수 전해질이 들어 있는 기초 수액에 비타민 등 별도 주사제를 넣은 형태다. 기초 수액에 비타민 B1과 알리신 등을 섞으면 마늘 주사가 되고, 글루타치온 등을 섞으면 백옥 주사가 되는 식이다.
진료과를 막론하고 적지 않은 병·의원이 피로 회복이나 기력 증진, 면역력 증가, 숙취 해소 등의 효능을 내세운 수액을 처방하고 있다. 은행잎 추출물을 넣은 ‘치매 예방 주사’, EDTA라는 화학물질을 넣은 ‘혈관 청소 주사’도 있다. ‘다이어트 주사’ ‘미백 수액’ 등 미용을 목적으로 한 주사도 많다.
경기도 성남에 있는 한 병원의 광고. /네이버 블로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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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격도 천차만별이다. 대부분 비급여로 처방되고 수익성이 높아, 병원 입장에선 효자 상품으로 꼽힌다. 영양 수액이 주요 수입원인 병원도 적지 않다. 일부 병·의원은 ‘수액 전문 병원’을 표방하며 영업에 나서고 있다. 수액을 맞을 수 있는 병상을 십수 개씩 갖춘 ‘수액 치료센터’ ‘수액 클리닉’ 등을 별도로 운영하는 병원이 적지 않은데, 이 가운데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수액 치료를 특화해 내세운 병원도 있다. 결혼을 앞둔 예비 신부, 수험생을 겨냥한 수액 패키지 프로그램도 판매된다. 제약업계에 따르면 국내 수액 시장은 약 5000억원 규모로 추산된다.
가정주부 이모(55)씨는 5년 전부터 주기적으로 영양 수액을 맞는다. 이씨는 “감기 기운이 있어 동네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링거 한 대 맞고 빨리 낫는 게 좋겠다’며 비타민 수액을 놔준 게 시작이었다”면서 “그 뒤로 컨디션이 좀 떨어진다 싶으면 수액을 맞는 편인데 효과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영양 수액 처방은 대체로 이런 방식으로 이뤄진다. “기력이 떨어진다” “식욕이 없다” 등의 증상을 의사에게 설명하면 의사가 그에 맞는 수액 주사를 권하거나, 본인이 직접 병원에서 광고 중인 수액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식이다. 후자의 경우 진료가 아예 생략되는 경우도 부지기수. 전문 의료인의 의료적 판단에 따른 처방이라기보다, 선택형 서비스에 가깝다.
많은 사람이 수액을 찾는 것은 이 같은 높은 접근성 때문만이 아니다. 효과가 빠르다는 인식도 한몫한다. 소화·흡수를 거치는 경구용 약과 달리, 정맥을 통해 성분이 직접 주입된다는 점이 즉각적인 회복을 기대하게 만든다. 실제로 병원을 찾은 환자들 사이에서는 “쉬는 것보다 수액 한 병이 낫다” “맞고 나면 바로 컨디션이 올라온다”는 후기가 흔하다. 온라인상에서는 병·의원별 수액 가격을 비교하는 정보나 ‘수액 맛집’을 추천하는 글이 공유되고 있다. 인스타그램에는 ‘수액’ 해시태그(#)를 단 게시물이 5만개가 넘는데, 대부분 수액을 맞고 있는 자신의 팔을 찍은 사진이다.
연예인 A씨가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올린 사진. /인스타그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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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영양 수액의 높은 인기와 별개로, 효과가 확실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세계적인 의료 전문 정보 리소스인 MSD 매뉴얼은 정맥 주사로 비타민이나 무기질을 혈류에 직접 공급하는 요법이 에너지를 증진시키고 면역을 강화하며 스트레스를 줄여준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데이터가 없다고 밝히고 있다. 한국보건의료연구원도 마늘 주사 등 영양 수액 5종을 검토한 결과, 피로 회복이나 미용 효과를 뒷받침할 과학적 근거를 찾지 못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오히려 아나필락시스(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중증 알레르기 반응)와 같은 중대한 부작용 가능성이 보고됐다. 당뇨가 있거나 심폐·신장 기능이 나쁜 사람은 급성 합병증이나 혈압 상승, 폐부종 등 심각한 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지적도 많다.
전문가들은 영양 수액에 좋은 성분이 많이 들었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개인의 건강 상태와 만성 질환 여부에 따라 효과가 다를 수 있다는 것. 입으로 음식물 섭취가 가능하다면 영양 수액을 맞을 필요가 없다고 조언하는 의료인도 적지 않다. 이종철 서울 강남구보건소장은 “영양 수액은 효과가 입증되지 않았음에도 수익성 때문에 관행처럼 처방되는 측면이 있는 게 사실”이라며 “피로 회복의 정석은 잘 먹고, 잘 쉬고, 운동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옥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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