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숲·정원·카페·도서관…
이끼 인기 실내외 확산
습, 하…. 코털에 일순 녹지(綠地)의 습기가 들러붙었다. “예쁘네, 잔디 깔았나?” 등산객마다 탄성을 터뜨렸다. 풀과 나무보다 이른 4억년 전부터 존재한 고대 식물. 서울 홍제동 안산(鞍山) 자락길 쉬나무 쉼터 일대에 129평 규모의 ‘이끼 숲’이 들어섰다. 3억원을 투입해 서대문구 측이 이달 초 조성했다. “서울시내 산자락에 이끼로 숲을 꾸민 건 이번이 처음”이라며 “색다른 녹색 경관을 제공하고 산불 위험을 낮추는 데다 미세 먼지와 이산화탄소를 걸러주는 ‘자연 필터’ 역할도 기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끼 생육을 위한 관수 시설(미스트 펌프)도 설치했는데, 따뜻한 날에는 몽환적인 물안개가 푸스스 피어오른다.
◇동네방네 ‘이끼’로 폐 세척
지난 17일 찾은 서울 홍제동 안산 자락길 ‘이끼 숲’에 물안개가 분사되고 있다.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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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가 이끼로 뒤덮이고 있다. 지난해 8월 여의도 당산공원에는 ‘이끼 정원’이 생겼다. 오래된 연못이 있던 자리다. 수중 펌프 시설 노후화로 고장이 잦고, 관리 비용도 적지 않았다. 한여름에는 연못 주변에 파리·모기 등의 해충으로 민원이 잦았다고. 흙으로 메우고, 털깃털이끼·서리이끼 등 이끼를 심었다. “도로가 인접한 위치를 고려해 탄소 저감 효과가 있는 이끼로 개방형 녹지 공간을 구상했다”고 했다. 윤기 잘잘 흐르는 천연 융단 주변에 수목과 암석을 배치했다. 새 명물이 됐다.
지난 6월에는 매년 35만명 이상 찾는 경기도 오산 물향기수목원에 270평 규모 ‘이끼원’이 들어섰다. 늘 구석에 있고, 그래서 별 볼일 없이 존재하던 이끼가 조경의 중심으로 진출한 것이다. 지난해 부천시 원미동 주민들은 구청·동사무소 앞뜰에 방치된 땅을 이끼류 18종으로 되살린, 이름하여 ‘이(끼)로운 탄소 중립 마을 정원’을 꾸몄다. 주변 경관과 쉽게 어우러지면서도 나무처럼 무겁지 않아 공사가 쉽고, 화초보다 관리도 훨씬 용이한 이끼의 장점. 여기에 피크닉용 테이블 등을 더해 “이웃 간 정서적 거리를 좁히는 소통 공간”을 꾀했다고. 지난 15일 경기도 우수 마을 정원으로 선정됐다.
◇이끼 덕에… 카페도 ‘숲세권’
카페 내부를 이끼로 꾸민 서울 신당동 '이끼 신당'. /이끼 신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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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 가습기 이끼. 서울 신당동에 있는 카페 ‘이끼 신당’은 겨울철에도 상시 촉촉하다. 상호처럼 이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벽면 한쪽 전체를 이끼로 채워놨는데, 손님들은 여기에 직접 물을 분무할 수도 있다. 도심 속 테라리움(Terrarium·유리 상자에 식물 생태계를 재현한 실내 장식)이라는 콘셉트처럼 “비 온 다음 날 숲 속에 온 것 같은 느낌”이라는 후기가 잇따른다. 제주도 애월에 지난해 문을 연 2만평 부지의 ‘이끼숲소길 카페’는 600m에 달하는 이끼숲 코스 덕에 ‘폐 세척’ 맛집으로 유명해졌다. “이끼 낀 나무와 돌의 분위기가 신비로울 정도예요.”
이끼 1㎡의 이산화탄소 흡수력이 소나무 10그루와 맞먹는다 하니, 사람 모이는 곳에 이끼가 필요하다. 강원도 정선군은 내년 2월 오픈을 목표로 ‘이끼 커뮤니티 카페’를 짓고 있다. 지역 특성 살리기 공모 사업으로 선정돼 지원받은 국비 2억원을 포함, 총 4억원이 투입된다. 정선군 관계자는 “인근 항골 계곡에 이끼가 빼곡해 명소로 소문난 곳이다 보니 이끼를 콘셉트로 한 이색 공간을 시도했다”며 “전시 및 체험 존으로도 활용해 관광객 유입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지난달에는 강원대에서 이끼 산업 활성화 방안 포럼이 열리기도 했다. 이끼는 이제 새 먹거리가 되려 한다.
◇작지만 강한 힘… 이끼에서 배우다
경기도 오산 물향기수목원 내 설치된 '이끼원' 풍경. /경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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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팡이와 헷갈리는 경우가 많지만 이끼는 엄연히 식물이다. 존재감은 작아도 북극 툰드라부터 용암 지대, 사막까지 가장 척박한 환경에서 번성한다. 망가진 숲이 회복될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재(再)야생화의 지표 식물. 최근 실험에서는 국제우주정거장 바깥 우주 공간에서도 살아남아 과학계를 놀라게 했다. 관리가 소홀해도 웬만해선 죽지 않는 이끼의 존재론적 강인함을 찬미하는 책도 활발히 출간되고 있다. 올해 ‘이끼적 사고–세상을 바꿀 태초의 힘’을 펴낸 이준택 전 세종대 교수는 “환경을 정화하고 새 생명이 자랄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는 이끼를 통해 “세상은 이끼와 같은 수많은 존재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향기를 뿜어내며 만들어진다”는 깨달음을 전한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은 매년 부친 한승원 소설가에게 책을 선물한다. 그중 최근 가장 재밌게 읽은 책으로 한승원은 ‘이끼와 함께’를 꼽았다. 인디언 후손인 생태학자 로빈 월 키머러(72)가 이끼의 삶을 풀어낸 자연 에세이. “이끼는 크기가 큰 식물들이 살 수 없는 공간을 차지한다. 이끼의 존재 방식은 작은 몸집을 축복으로 여기는 것이다. 자신의 독특한 구조를 공기와 지면 사이에 작용하는 물리 법칙에 맞춤으로써 번성한다. 작기에 한계는 강점이 된다. 누가 내 조카에게도 이를 알려줬으면 좋겠다.”
투명한 유리병에 이끼와 돌멩이 등으로 '나만의 작은 숲'을 꾸미는 이끼 테라리움. /식물가게 장식 |
미술계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석파정 서울미술관은 다음 달까지 7인전 ‘이끼: 축축하고 그늘진 녹색의 떼’를 개최한다. 안진우 이사장은 “최근 높아진 이끼에 대한 관심에 발맞춰 기획했다”며 “소리 높여 화려함을 경쟁하지 않고도 시선이 닿지 않는 음의 공간에서 천천히 양의 생명력으로 확장하는 이끼의 속성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영감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박지수 화가의 출품작 ‘모든 것의 장소’는 폐허로 변한 겨울 야산과 그 밑바닥에서 천천히 회복하는 초록의 군집을 드러내고 있다. 비단 자연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침실로 도서관으로, 이끼의 확장
살아있는 이끼를 필터로 활용한 가전용 공기 청정 가습기. /모스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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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술 차원에서도 이끼는 각광받고 있다. SH공사가 특허 출원해 지하철 9호선 마곡나루역 인근에 설치한 실외 공기 정화용 ‘스마트 모스 월(Moss Wall)’부터, 살아있는 이끼를 필터로 활용하는 가습기 등 ‘식물 융합 기술’이 시장을 두드리고 있다. 지난 9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IFA 2025’에는 국산 ‘이끼 LED 전광판’이 처음 등장했다. 공항·호텔·공공기관 등을 타깃으로 한 광고용 액정 화면과 천연 이끼를 결합해 독특한 외관으로 시선을 사로잡고, 실내 공기 정화와 습도 유지 기능까지 더한 것이다. 이끼를 IT 기기와 결합해 기후가 건조한 중동·유럽 등 진출을 꾀한다는 복안이다.
지난 10월 개관한 경기도서관 실내 나선 계단을 통째로 감싼 천연 이끼. 탄소 저감 및 습도 조절, 소음 흡수 등 이끼의 특장점에 주목한 시도다. /스칸디아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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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의 또 다른 기능은 흡음(吸音). 지난 10월 개관한 경기도서관은 국내 최대 규모의 공공 도서관으로 화제를 모았는데, 이끼도 한몫했다. 1층부터 4층까지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을 전부 천연 이끼로 감쌌다. 관계자는 “기후 위기 대응을 도서관 공간·프로그램으로 구현하는 기후 환경 도서관을 표방하다 보니 이끼라는 상징적인 재료를 사용했다”며 “흡음률 계수 검사 결과 0.91이 나왔는데 피아노 학원 등에서 사용하는 흡음재가 대략 0.6 수준임을 감안하면 효과가 큰 편”이라고 말했다. 도서관 꼭대기 층에는 이끼 테라리움이 전시된 ‘이끼연구소’도 설치했다. 더 연구할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정상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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