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의 언어로는 ‘재심 무죄 판결’이지만,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면 그것은 반세기를 건너온 삶의 응답이다. 국가가 한 인간에게 저질렀던 침묵의 폭력이 마침내 시간 앞에서 무너진 날이었다.
2025년 12월 11일.
윤정현 신부가 직접 기록한 『소다석일지』에 따르면 이날은 그가 세상에 태어난 지 2만 5723일째 되는 날이다. 성서적 시간의 개념으로 보면, 7년을 일곱 번 채운 뒤 맞는 쉰 해, 곧 희년의 문턱에 선 날이기도 하다. 희년은 빚을 탕감하고 노예를 풀어주며 억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시간이다. 성서 속 시간의 개념이 현실의 법정과 겹쳐진 드문 순간이었다.
윤 신부는 1976년 반공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후 49년 동안 그는 사회적 유죄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리고 정확히 49년이 흐른 2024년 11월, 그는 재심을 청구했다. 법원은 이를 받아들였고, 2025년 12월 11일 무죄를 선고했다. 시간은 우연처럼 보였지만, 삶의 결로 보면 필연에 가까웠다.
재판부는 미란다 고지 없는 체포, 영장 없는 연행, 불법 구금과 고문 정황을 인정했다. 이는 단순한 절차 위반이 아니라 국가 권력이 개인의 존엄을 어떻게 파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었다. 법원은 늦었지만 분명하게 말했다. 그 유죄는 법의 이름을 빌린 폭력이었다고.
그러나 판결문 어디에도 다 담기지 않는 것이 있다. 윤 신부가 기록한 악몽의 시간들이다. 감옥에서 나온 뒤에도 밤마다 반복되던 체포와 고문의 꿈, 땅속에 묻힌 듯 움직일 수 없던 가위눌림, 땀에 흠뻑 젖은 채 깨어나던 새벽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가족과 형제자매들이 감당해야 했던 말 없는 고통들이다. 국가의 폭력은 한 사람에게서 끝나지 않고, 삶 전체로 번져 갔다.
이번 무죄 판결은 단지 ‘죄가 없었다’는 선언이 아니다.
윤 신부의 표현대로, 그것은 의식과 무의식 속에 남아 있던 아픈 기억의 조각들을 강물 위로 흘려보내는 시작이다. 완전한 치유는 아닐지라도, 사법부가 국가 폭력의 흔적을 인정함으로써 개인이 자기 삶을 다시 주체적으로 살아갈 최소한의 문이 열렸다.
윤정현 신부가 재심을 청구한 이유는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국가보안법으로 희생되고 고통받아온 수많은 사람들에게 작은 희망의 빛이 되기를 바랐다고 적었다. 북한이 존재하는 한 국가보안법은 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해 그는 단호하다. 우리 사회는 그렇게 허약하지 않으며, 형법만으로도 국가의 안녕과 사회 질서는 충분히 지켜질 수 있다고 말한다.
이념 갈등과 편 가르기를 통해 권력을 유지해온 구시대의 악법은 이제 역사 속으로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윤정현 신부는 한국 현대사에서 흔히 그려지는 ‘투사’의 얼굴을 갖고 있지 않다. 그는 앞에 나서 외치기보다 침묵으로, 투쟁보다 성찰로 질문을 던져온 사람이다. 그의 사유의 뿌리는 다석 유영모 선생의 사상에 닿아 있다. “나를 섬기면 종교가 된다”는 다석의 말처럼, 윤 신부에게 종교는 제도도 교리도 아닌 삶 그 자체였다.
그는 설교보다 침묵을, 이론보다 생활을 택했다. 가난과 절제, 노동과 사유 속에서 신앙을 살아냈다. 제도 종교의 울타리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윤리를 더 소중히 여겼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지점이 냉전과 이념의 시대에는 의심의 대상이 됐다. 사유는 불온으로, 침묵은 반역으로 오해받았다.
그러나 반세기가 흐른 뒤, 사법부는 분명히 선을 그었다. 그의 말과 삶은 체제를 위협한 범죄가 아니라 사유와 표현의 자유의 영역에 속한다고. 이는 윤정현 신부 개인의 복권을 넘어, 한국 사회가 종교와 양심의 자유를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에 대한 중요한 기준을 제시한다.
현재 윤 신부는 전북 고창 선운사 인근에서 10년 가까이 수행과 성찰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세상과 거리를 두되, 삶으로 질문을 던지는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오는 12월 21일 오후, 그곳에서는 50년 만의 무죄를 기리는 작은 모임이 열린다. 시와 노래, 무용이 어우러진 자리다. 거창한 축하가 아니라 침묵으로 견뎌온 시간을 조용히 안아주는 의식에 가깝다.
윤정현 신부의 무죄는 과거를 지운 사건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묻는다.
“국가는 어디까지 개인의 사유에 개입할 수 있는가. 종교와 양심의 자유는 말이 아니라, 삶으로 어떻게 지켜져야 하는가.”
희년의 판결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침묵과 성찰로 살아낸 한 인간의 시간이, 이제 우리 사회의 질문이 되고 있다.
[사진=아주경제 DB] |
아주경제=아주경제
- Copyright ⓒ [아주경제 ajunews.com] 무단전재 배포금지 -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