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부터 2000년까지 방영됐던 드라마 카이스트 포스터./SB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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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에서 만난 한국인 공학 교수가 수능 이야기를 하다가 자신을 ‘카이스트 키즈’라고 했다. 중·고생 때인 1999년부터 2000년까지 방영된 드라마 ‘카이스트’를 보고 공학자의 꿈을 키웠다는 것이다. 그는 “체크무늬 셔츠를 입고 무테 안경을 쓰고 밤새 실험과 연구에 몰두하는 드라마 속 학생들이 어렸을 때는 멋있고 좋아 보였다”고 했다. 우리 시대 연구자 중에는 이 드라마가 뿌린 씨앗에서 자란 사람이 적지 않을 것 같다.
‘카이스트’는 당시 실제 카이스트(한국과학기술원) 캠퍼스와 연구 환경을 모티브로 삼아 공대생들의 우정과 성장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법정·의학 드라마가 매년 여러 편씩 방영되며 인기를 끄는 요즘엔 다소 낯설지만, 당시 ‘카이스트’는 두터운 팬층을 형성하며 신드롬을 일으켰다. 이른바 ‘카이스트 키즈’도 탄생했다. 카이스트 방문객이 늘고 중·고생 사이에 이공계 진학 선호도가 폭발적으로 상승했다는 보도가 잇따랐다. 카이스트 전산학부 교수는 “학교 가는 버스만 타도 ‘똑똑한 학생’이라고 자주 격려받으니 학교와 학과에 대한 애정이 커졌다”고 술회했다.
‘카이스트 키즈’의 탄생은 단순히 드라마 때문만은 아니었다. 1990년대 중후반을 휩쓴 ‘컴퓨터 붐’이라는 시대적 배경이 드라마 제작과 이공계 인기를 견인했다고 봐야 한다. 인터넷이 폭발적으로 보급되며 과학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했다. 1995년 처음 등장한 ‘인터넷 카페’(지금의 PC방)가 1999년 말에는 1만5000여 개에 달할 정도였다. 이런 큰 변화를 이끌었으니, 당시 공학자들은 ‘멋진 사람들’로 각인됐다. 덕분에 드라마는 시청률 대박을 터뜨렸고, 이공계는 다시금 최고 인재를 끌어모으는 활황을 맞았다.
그러나 이 황금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2000년대 초부터 ‘의대 쏠림’ 현상이 고착화되면서 이공계는 또다시 그늘에 갇혔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인공지능(AI) 붐’이라는 새로운 시대적 흐름 속에 다시 이공계를 주목하고 있다. 수시 모집에서는 카이스트 등 4대 과학기술원의 지원자 수가 최근 5년 중 가장 많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렸지만, 수능 만점자 중 상당수가 의대 진학을 선택하며 ‘의대 쏠림’이 올해도 견고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AI 붐’을 동력 삼아 ‘이공계 붐’을 다시 일으켜야 한다. 드라마를 만들자는 얘기가 아니다. 공학에 돈과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집중된 지금, 드라마 ‘카이스트’ 속 학생들처럼 밤새 연구와 실험에 몰두하는 공학자가 멋있다는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 그러려면 연구 환경과 지원의 지속성이 중요하다. 국가가 자격증을 주고 고소득으로 사람들이 선망하는 의사만큼, 실험실에서 밤을 새는 공학자도 안정적이고 매력적이라는 인식이 자리잡을 때 비로소 다음 세대의 ‘카이스트 키즈’는 자연스럽게 탄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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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강다은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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