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리병동에서 본 참상, 의료 시스템 없으면 사명감마저 마비돼
재앙은 예고 없이 온다… 변종 감염병 연구, ‘보건 안보’ 점검을
지난달 세인트폴 병원 마벅 바이러스 격리병동에서 환자를 진찰하는 유덕종 의사. /유덕종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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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 남서부, 문명과 자연의 경계에 있는 오모(Omo) 지역의 중심 도시 진카(Jinka). 케냐와 남수단을 잇는 국경 무역과 독특한 부족 문화를 보려는 관광객들로 북적이던 곳이었다. 지난 11월 중순, 그곳이 유령 도시처럼 얼어붙었다. 치명적인 ‘마르부르크 바이러스병(Marburg Virus Disease)’이 발생해 8명의 목숨을 앗아갔기 때문이다.
에볼라와 같은 계열인 이 병은 감염 초기에 고열로 시작해 며칠 사이에 온몸의 구멍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는 급성 출혈열 증상을 보인다. 높은 치사율에 백신마저 없으니 에티오피아 전역에 비상 경보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감염병보다 무서운 것은 ‘실체 없는 공포’였다. 불확실성 속에 정보는 왜곡됐고 유언비어는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방역 당국은 갈팡질팡했고 현장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내가 근무하는 병원에도 긴장감이 감돌았다. 마르부르크 의심 환자 3명이 이송돼 급하게 격리 병동을 마련한 첫날, 상태가 위중한 한 환자가 숨을 거두자 공포는 극에 달했다. 병원 측은 내과 전문의와 레지던트들을 격리 병동에 배치하려 했지만,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죽음에 대한 본능적 공포 앞에서 의료인의 사명감마저 무력해지는 듯했다. 에볼라나 마르부르크 바이러스는 공기로 전염되지 않는다. 환자의 혈액이나 체액에 직접 접촉하지 않는 한, 적절한 개인 보호 장구만 갖추면 충분히 통제 가능하다. 결국 과거 우간다에서 수차례 에볼라 사태를 겪어 본 내가 자원해 격리 병동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일러스트=이철원 |
그곳의 실상은 예상과 달랐다. 정밀 검사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남은 환자 두 명은 마르부르크 감염자가 아닌 게 분명해 보였다. 여성 환자는 급성 식중독 혹은 원한에 의한 독살 시도 가능성이 높았고, 남성 환자는 각혈을 동반한 세균성 폐렴이었다. 진짜 문제는 바이러스가 아니라 ‘의료 시스템의 실종’이었다. 급하게 마련된 격리 병동에는 X-ray 기기도 없었고, 기본적인 혈액 검사조차 불가능했다. 채혈을 해야 했지만 담당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병동에 배치된 레지던트도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수라장 같은 현장을 묵묵히 지킨 것은 방호복을 입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간호사들이었다. 그들의 헌신 덕분에 겨우 환자들의 병력을 청취하고 이학적 검사 후 대증 요법으로 이어갈 수 있었다.
과거 우간다의 사례가 떠올랐다. 에볼라가 창궐했을 때, 한 결핵 환자가 심한 각혈을 하며 응급실을 찾았다. 겁에 질린 의료진은 그를 에볼라 환자로 단정하고 병원 밖으로 도망쳤다. 방치된 환자는 집으로 돌아갔고, 지역 사회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공포가 의료의 본질과 이성을 압도할 때 어떤 비극이 벌어지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이런 면에서 대한민국 의료 체계는 독보적이다.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격리 병동이 일반 병동에 준하는 정밀한 진료 체계를 유지하는 모습을 보았다. 의료진은 방호복의 무게를 견디며 사투를 벌였고, 그 과정에서 과로와 감염으로 목숨을 잃은 의사도 있었다. 타국에서 아파 본 사람이라면 한국의 의료 수준이 얼마나 세계적인지 절감하게 된다. 적정 비용으로 최상의 진료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6·25 전쟁 때 에티오피아를 비롯한 이웃들의 도움으로 일어선 나라가 이제는 최상의 진료를 보장하는 기적을 일궈낸 것이다. 수많은 이의 희생과 헌신 위에 세워진 결과물이다.
지난달 세인트폴 병원 마벅 바이러스 격리병동의 유덕종 의사와 간호사들. /유덕종 제공 |
마르부르크나 에볼라 같은 치명적인 출혈열이 한국에서 유행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지만 안심할 순 없다. 만약 마르부르크의 치사율에 코로나19 수준의 공기 전파력이 더해진 변이 바이러스가 등장한다면 어떻게 될까? 단순한 보건 위기를 넘어 인류 문명의 존속을 위협하는 대재앙이 될 것이다.
최근 의학계의 관심은 비만 치료제 등 ‘삶의 질’ 향상에 쏠려 있다. 그러나 인류의 안전을 실질적으로 위협하는 것은 변이 속도가 빠른 RNA 바이러스다. 코로나19, HIV, 뎅기열, 지카 바이러스 등은 여전히 완벽한 예방책이나 치료제가 없는 상태다. 바이러스는 국경도 빈부도 가리지 않는다.
재앙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정부와 대학, 연구소가 연계해 변종 바이러스를 연구하고 백신을 개발하며 대응 매뉴얼을 선제적으로 구축해야 한다. 의료 인프라 확충만큼 중요한 것은 위기 상황에서도 시스템이 작동하게 만드는 ‘사회적 신뢰’다. 아프리카의 비극이 ‘우리의 내일’이 되지 않도록 보건 안보를 재점검해야 한다.
☞의사 유덕종(66)
1992년 ‘정부 파견 의사’ 1기로 선발돼 우간다로 갔다. 계약을 연장하며 아프리카에 남았고 지금은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의료 봉사를 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길러낸 의사만 4000명. 아산상, JW성천상 등을 받았다. 현지에선 아디스아바바를 줄여 아디스라 부르는데 ‘아디스 레터’는 그곳에서 띄우는 편지다.
[유덕종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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