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종강 돌, 칠순, 구순의 어머니. 필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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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강 |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대학 1학년이었던 1974년, 결정적 결단을 앞두고 나는 작은 내 방에 들어가 하루 종일 나오지 않았다. 잡혀가거나 고문을 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 20년 동안 가꿔왔던 ‘가문의 꿈’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 나를 더 망설이게 했다. 씻지도 않은 채 이불을 뒤집어쓰고 뭉갰다. 어머니가 이따금 방문을 열어보시고는 아무 말 없이 닫으셨다. 그렇게 사흘째 되던 날 아침 밥상머리에서 중학생이었던 여동생에게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오빠가 지금 하고 있는 고민의 내용을 이 엄마는 잘 모른다. 너도 역시 잘 모르겠지. 그렇지만 우리는 오빠가 지금 세상을 바르게 살기 위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해하자. 바르게 산다는 게 결코 쉽지 않은 세상이구나, 우리는 가족으로서 최소한 그렇게라도 이해하자.”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이어서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동안 엄마가 세상을 바르게 살라고 가르쳤잖아. 그렇게 가르쳐 온 ‘에미’로서 이번에 오빠가 어떤 결정을 하든, 나는 아무 말 하지 않기로 했다.”
그 말씀을 내 얼굴을 보지 못한 채 동생에게 하셨다. 며칠 뒤 나는 밤새 등사기로 밀어낸 유인물 뭉치를 싸 들고 학교로 들어가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학보사 기자가 찍어 준 사진이 그날의 기록으로 남았다. 그날 저녁 나를 연행해 가던 형사는 차 안에서 “야 인마, 손에 묻은 등사잉크라도 좀 지우고 잡히든지…”라고 혀를 찼다.
필자가 스무살이던 1974년, 유신헌법 폐지 주장 집회에서 결의문을 낭독하고 있다. 필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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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가정주부인 어머니가 어떻게 아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을까?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것이 궁금했다. 돌이켜보면 어머니에게는 그런 신기한 기억들이 몇가지 있다. 잔가시가 많은 생선이 밥상에 올라올 때마다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 있다.
“이 작은 생선에 가시가 왜 이렇게 많은 줄 아니? 더 큰 물고기가 잡아먹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야. 가시가 많으면 먹다가 목에 걸릴 테니까….”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어머니께 여쭤보았다. “그렇지만 가시가 많다는 것을 아는 것은 이미 먹힌 다음이잖아요?” 어머니가 이어서 말씀하셨다. “그다음부터 동료들을 먹지 않잖아. 자기는 죽지만 동료들을 살릴 수 있잖아. 그게 바로 ‘희생’이다. 작은 물고기도 그렇게 산다. 자신과 자기 가족만을 위해서 사는 것처럼 천박한 삶은 없다.” 그 똑같은 얘기를 수십번도 더 들으며 자랐다.
그로부터 13년 뒤인 1987년 7, 8월 노동자 대투쟁이 터졌다. 그와 같은 사건은 인류 역사에 다시는 없을 것이다. 87년 7, 8월 두달 동안 우리나라에서 3241건의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머리띠를 묶어 맨 수만명 노동자들의 모습과 휘날리는 수백수천의 깃발과 현수막의 물결이 두달 넘도록 하루도 빠짐없이 뉴스의 첫머리를 장식했다. 아, 이런 날이 오는구나…. 그 87년 여름 어느 날, 티브이(TV) 뉴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어머니가 지나가는 말처럼 말씀하셨다.
“그동안 말은 안 하고 살았지만, 사실은 내가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조합원이었다. 남편에게도 말을 못 하고 살았지만, 사실은 내가 전평 조합원이었어. 화신백화점 강당을 빌려 대의원 대회를 하던 날….” 아, 40여년 전의 얘기를 마치 어제 일처럼 자세히 기억하고 계셨다.
“그때 같이 활동했던 사람들은 어느 날 아침 한강에서 시체로 발견되고, 간밤에 죽창에 찔려 죽고…. 그래도 다들 열심히 했지. ‘6·25 사변’ 때 피난 갔다가 돌아와 보니 노동조합 간부들 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한명도 없었지.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모두 다 죽었는데, 다들 똑똑하고, 말 잘하고, 글 잘 쓰고, 잘생기고…. 정말 아까운 사람들이었다.”
그날 나는 비로소 해묵은 숙제를 풀었다. 어머니가 나에게 수십번도 더 해 주신 ‘생선 가시 이야기’ 등은 전평 시절 공부 모임에서 배웠거나 수련회에서 어느 강사가 해 준 강의 내용이었을 것이다. 처녀 시절 은행원으로 일하시며 몇년 남짓 겪었던 ‘전평’ 활동 경험이 어머니의 남은 평생을 규정한 것이다. 감히 말하거니와 어머니가 없었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다. 그 어머니가 지난 12월8일 생을 마감하셨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노동운동을 한다는 것은 그토록 엄중한 일이었다. 세종호텔 앞 철 구조물 위에 올라가 오늘로 322일째 농성중인 해고 노동자 고진수 지부장의 얼굴에서 역사 속에 사라져 간 수많은 선배 노동자들의 모습을 본다. 대통령과 노동부 장관이 바뀌어도 좀처럼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권력은 이미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말이 맞는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가 노동자의 행복한 삶을 위한 노력을 포기해야 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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