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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01 (목)

    [기고] 통일교 평화프로젝트, 국가가 할 일 아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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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교분리는 민주 국가의 대원칙이다. 종교가 권력을 지배해서는 안 되며, 국가 또한 특정 교리를 정책의 잣대로 삼아서는 안 된다. 이는 자유와 다원성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합의다. 그러나 이 원칙만으로 세계평화를 향한 초국가적 구상의 전개 과정을 온전히 설명하기에는 현실의 층위가 훨씬 복합적이다.

    한일해저터널은 수십년간 논쟁의 한복판에 있었다. 특히 이 사업이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가정연합·옛 통일교)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논쟁의 불을 지폈다. 많은 이들이 이를 종교의 정치 개입이나 교세 확장의 수단으로 단정해 왔다. 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단순한 토목사업 이상의 맥락이 존재한다. 통일교 구상에서 해저터널은 일본과 한반도를 잇는 통로이자 대륙과 해양을 연결하는 상징적 관문이다. 이는 아시아와 유럽, 북미를 잇는 ‘피스로드(국제평화고속도로)’, 남북 접경지 평화공원, 한반도 유엔 제5사무국 유치 비전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평화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세계일보

    문용대 작가


    문제는 실현 권한의 소재다. 예산, 외교, 안보 결정권은 오직 국가와 정치권에 귀속된다. 종교나 시민사회는 비전을 제시할 순 있으나, 이를 제도화할 권한은 없다. 여기서 구조적 긴장이 발생한다. 대의(大義)는 정치 밖에서 태어나지만, 이를 현실로 바꾸는 열쇠는 정치가 쥐고 있는 격이다.

    이 긴장 속에서 대의는 종종 정치의 ‘정문’이 아니라 ‘뒷문’을 두드린다. 공개토론과 공식 절차만으로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현실 앞에서 비공식적 설득과 우회로를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곧바로 음성적 행위로만 규정하는 것은 사태의 일면만 보는 시각이다. 사익을 위한 로비는 엄단해야 마땅하나, 동시에 물어야 한다. 공적 대의조차 제도의 정문으로 들어올 수 없었던 정치구조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정교분리 논쟁이 격화되는 까닭은 정치가 장기 비전과 초국가적 과제를 감당하지 못할 때 생긴 공백을 민간이 메우려 하기 때문이다. 한·일 간 구조적 화해나 동북아 평화망 구축 같은 과제를 어느 정부가 일관되게 추진해 왔는가. 비국가 행위자의 등장은 신념의 과잉이라기보다 국가 책임의 결핍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통일교의 평화프로젝트는 다양한 비판 속에서도 한 가지 사실을 시사한다. 국가가 방기한 장기 구상을 누군가는 붙들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구상이 현실과 맞닿는 순간 정치권과의 접촉은 선택이 아닌 필연이 된다. 이를 단순히 정교분리 위반으로만 치부하면 논쟁의 초점은 평화라는 본질적 대의를 가리게 된다. 결국 종교는 순수성을 의심받고, 정치는 결단을 미룬 채 책임을 회피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한일해저터널을 비롯한 평화프로젝트는 여전히 검토와 논쟁의 대상이다. 다만 그에 앞서 질문해야 한다. 왜 이런 평화 구상들은 늘 비국가의 몫으로만 남았으며, 정치는 왜 결정적 순간마다 뒷걸음질 쳤는가.

    이제 종교의 비전을 국익과 공공성의 언어로 번역하고, 단기적 계산을 넘어 장기적 가치를 선택할 정치지도자가 필요하다. 대의가 더 이상 정치의 뒷문을 두드리지 않아도 되는 사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평화의 출발점일 것이다.

    문용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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