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에서 찾았다 오늘 별이 된 사람]
2022년 1월 1일 98세
1937년 평안북도 정주에 사는 13세 소년 지명관(1924~2022)의 이름이 조선일보에 처음 실렸다. 명문 평양공립고보(이듬해 평양제2중으로 교명 변경) 합격자 명단이다. 동기생 216명 명단 속에 이름이 들어 있다. 중등학교에 합격한 이들의 명단이 신문에 실리던 시절이었다.
30~40대인 1960년대엔 조선일보 필자로 이름이 자주 등장했다. 서울대 문리대 종교학과 석·박사 과정을 마치고 덕성여대 교수, 서울대 강사, 사상계 주간, 덕성여고 교장으로 있던 시기이다. 이 기간 조선일보 기고 글은 30여 편에 이른다. 대담·좌담·세미나·학술회의 기사 등을 포함하면 150편이 넘는다.
1964년 4월 23일자 1면 지명관 시론. |
신문의 얼굴인 1면에 실린 ‘시론’만 꼽아도 최소 5편이다.
‘가두로 끌어낸 건 누군가/ 이제와서 ‘데모’의 책임을 학교측에 돌릴 수 있을까/ 어느 때는 ‘애국’이라더니/ 학원은 정권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1964년 4월 23일 자 1면)
‘민족적 민주주의를 비판하면서/ 집권 위한 ‘슬로건’은 자기 붕괴를 내포한다’(1964년 6월 2일 자 1면)
‘해방 19년… 내일을 위한 회고와 반성/ 비극은 ‘나만이’ 살려는 데서’(1964년 8월 13일 자 1면)
‘정부·여당에 붙인다/ 동경조약과 우리의 반성/ 대중의 눈초리에서 현실을 읽으라’(1965년 6월 29일 자 1면)
‘이 사태를 초극하자’(1971년 10월 21일 자 1면)
주요 사건 때 대담·좌담에도 여러 차례 참여했다. 1964년 ‘언론윤리위법’ 파동 때 지명관은 함석헌과 함께 ‘이 나라의 오늘을 말한다’ 대담에 나섰다. ‘언론보다는 정치윤리법을/ 이번 사태는 민심 파악하는데 큰 도움’(1964년 9월 6일 자 3면) 등의 제목으로 지면에 실렸다.
함석헌 지명관 대담. 1964년 9월 6일자 3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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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좌담 기사는 ‘10월 유신’ 이후 지명관이 일본으로 건너갈 때까지 계속 이어진다.
서울대 교수 김붕구와 대담한 ‘현대 구미의 지식인’(1969년 1월 19일 자 4면), 함석헌·안병욱과 함께한 ‘간디 탄생 100년 좌담회’(1969년 10월 2일 자 4·5면), 1971년 신년 주말마다 실린 ‘일요 정담(鼎談)’, 일본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자살 사건을 두고 조선일보 주필 선우휘와 대담한 ‘지성의 죽음’(1972년 4월 18일 자 4면) 등이다.
일본에 있던 1973~1988년에는 월간 ‘세카이’에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실었다. ‘T.K.생(生)’이라는 필명으로 정체를 숨겼다. 한국 군사정권의 인권 탄압과 민주화 운동이 주요 내용이었다. 한국 정보 요원들이 필자를 알아내려 했지만 허사였다. 지명관은 15년 후인 2003년 ‘T.K.생’이 자신이라고 밝혔다. 자신을 ‘세카이’ 편집장에게 소개한 이가 선우휘였다고 했다.
2003년 7월 26일자 A27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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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교수는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고향 선배 선우휘 당시 조선일보 주필이 나를 야스에 편집장에게 소개했다”며 “선우 주필은 ‘T.K.생’의 정체를 알고 있었던 몇 안 되는 지인 가운데 하나”라고 말했다. 지 교수는 “유신체제 출범과 긴급조치 발동 등으로 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 한국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외부 세계에 알리고 싶어서”라고 집필 동기를 밝혔다.”(2003년 7월 26일 자 A27면)
지명관은 자신을 보호해 준 선우휘에게 고마움을 나타냈다. 그는 “중앙정보부 관계자가 선우 주필에게 ‘일본통이니 TK생이 누구인지 알 것 아니냐’고 물었을 때, ‘글쎄,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 아니냐’고 둘러대며 숨겨줬다”(2003년 7월 30일 자 A23면)고 했다.
선우휘도 지명관에게 고마움을 나타내는 칼럼을 쓴 적이 있다. 1982년 4월 25일 자 ‘선우휘 칼럼’에서 “나와 함께 자란 절친한 고향 친구 어머니”를 회고했다. 해방 후 월남한 직후 전염병인 발진티푸스에 걸려 친척들도 외면할 때 지명관이 자신을 집으로 데려갔고 그의 어머니가 돌봐줬다는 내용이다.
선우휘는 외아들인 지명관에게 죽을 수도 있는 전염병을 옮길까 염려했다. 아들이 두 살 때 혼자가 된 어머니가 말했다. “아니, 우리 아이한테 전염병이 옮겨질 리는 없어. 하나님이 살펴주고 계시거든.” 선우휘는 “이 비과학적인 무지막지한 믿음-그러나 그건 과학적 차원을 넘어서서 얼마나 놀랍고 무서운 종교적 신념인가!”라며 “나는 이제까지 그런 강인한 신앙에서 나온 신념을 다른 사람에게서 본 적이 없다”고 썼다.
2010년 8월 16일자 A29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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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관은 1993년 귀국 후 한림대 석좌교수·일본학연구소장을 지냈다. 한때 정부 직책도 맡았다. 김대중 정부에서 한일문화교류 정책자문회의 위원장과 KBS 이사장을 지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취임사 준비위원장도 지냈다. 2003년 정권에 쓴소리를 하고 KBS 이사장에서도 물러났다.
2006년 저서 ‘경계를 넘는 여행자’에서 당시를 회고했다. “민주주의적인 지도력을 발휘하는데 노무현 대통령은 실패하고 말았다. 국민을 적과 아군으로 가를 게 아니라, 다소 의견이 달라도 대화하면서 함께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2006년 6월 24일 자 D2면)
[이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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