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의 산증인 1998년 7월 이해찬 당시 교육부 장관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국정과제 추진 상황을 보고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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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에 1987년 6월항쟁 진두지휘…DJ 평화민주당서 정계 입문
60대 이후 민주당 ‘킹 메이커’로…이재명 대통령의 ‘멘토’ 역할
‘대쪽’ ‘버럭’ 별명…자신 차량에 ‘딱지’ 안 뗀 경찰 처벌시키기도
25일 74세를 일기로 별세한 이해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은 일생을 한국 민주주의와 함께해온 대한민국 현대사의 산증인이었다.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젊은 시절을 헌신한 고인은 30대 이후에는 제도권에서 7선 국회의원과 국무총리, 여야 대표를 지내며 한국 정치를 이끌어온 거목으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현 더불어민주당 계열 정당에서 배출한 김대중·노무현·문재인·이재명 대통령을 탄생시키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한 그를 민주진영에서는 정치적 대부로 불러왔다.
1952년 충남 청양 출생인 고인은 서울대 공대에 진학한 뒤 사회학과에 다시 입학하며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유신체제였던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1년 가까이 옥고를 치렀고, 출소 후에는 서울대 인근에 광장서적을 개업하고, 출판사 돌베개를 설립하는 등 재야에서 운동을 이어갔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가담자로 10년형을 선고받았다. 고인은 내란음모 사건 재판에서 “이 목숨 다 바쳐 이 땅이 민주화될 때까지 싸워나가겠다. 당신들이 저지르고 있는 역사적 범죄를 결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일갈했다.
30대는 재야운동과 제도권 정치 입문의 시기였다. 1982년 성탄절 특사로 석방된 뒤 재야에서 민청련 상임부위원장 등을 맡으며 민주화운동을 이어갔다. 1987년 6월항쟁을 진두지휘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에서 상황실장을 맡아 직선제 개헌 쟁취에 기여했다.
2004년 8월 이해찬 국무총리가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국무회의장에 들어서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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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평화민주당에 입당하며 정계에 입문한 그는 1988년 13대 총선 때 서울 관악을에 출마해 민주정의당 김종인 후보, 통일민주당 김수한 후보 등 쟁쟁한 상대를 꺾고 국회에 입성했다.
40대는 지방자치와 국정 경험을 쌓아나간 시기였다. 1995년 민선 1기 조순 서울시장 때 정무부시장을, 1998년 김대중 정부 첫 교육부 장관을 지냈다. 교육부 장관 재직 시 고교 평준화 확대, 야간 자율학습 폐지 등 과감한 개혁으로 ‘이해찬 세대’라는 신조어도 낳았다.
50대에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총리직에 올랐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4년 고건 전 총리에 이어 총리로 임명된 그는 노 전 대통령과 ‘맞담배’를 피우는 실세 총리이자 책임총리로 국정 전반을 총괄했다. 총리 재직 시 행정수도 이전을 주도했던 그는 이후 19대 총선에서는 세종시로 지역구를 옮겨 국회의원에 두 차례 더 당선됐다. 대정부질문 때 한나라당 의원들과 거침없는 설전으로 ‘버럭 해찬’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섰지만 낙선했다. 2008년 1월 대통합민주신당 손학규 대표 체제 출범 이후 탈당했고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2011년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과 함께 야권 통합 추진 모임인 ‘혁신과 통합’을 주도하며 정계로 돌아왔다.
2024년 11월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이 이재명 민주당 대표와 국회에서 열린 외교안보통일자문회의 출범식에 입장하고 있다. 연합뉴스·박민규 선임기자 parkyu@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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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대 이후 그는 민주당 대선 경선과 본선 등에서 ‘킹 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하며 선거 승리의 공식을 써 내려갔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 세종시에서 당선된 뒤 민주통합당 대표에 올랐다. 이후 18대 대선 문재인·안철수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사퇴 압박을 받다 중도 하차했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는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 체제에서 공천 배제된 뒤 탈당, 무소속으로 당선돼 복당했다.
문재인 정부 때인 2018년부터 2020년까지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지냈다. 2018년 당시 여러 건의 검찰 수사를 받던 이 대통령을 “당의 소중한 자산”이라고 했고, 2021년 20대 대선 경선에서 이 대통령 지지를 선언했다. 2024년 22대 총선에서 선거대책위원회 공동상임선대위원장을 맡으며 이 대통령의 ‘멘토’ 역할을 이어갔다. 21대 총선에서 민주당은 위성비례정당을 포함해 300석 중 180석을 확보, 민주화 이후 최다 의석수 정당이 됐다. 2018년 전당대회 때에는 “개혁정책이 뿌리내리려면 20년 정도는 집권하는 계획을 가져야 한다”고 했고, 21대 총선을 앞두고는 “총선 압승을 기반으로 2022년 대선에서 재집권해 한반도 평화를 가져오는 100년을 전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고인을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에 임명했다.
‘대쪽’ ‘버럭’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고인은 깐깐한 성격과 관련한 일화도 많다. 1997년 고인은 불법 유턴을 한 자신의 차량에 ‘딱지’를 떼지 않은 교통경찰을 규정대로 처벌받게 했다.
그는 생전 스스로를 개량주의자라고 밝혔다. 자서전 <청양 이 면장댁 셋째 아들 이해찬>에서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오가는 불성실하고 불철저한 근본주의자보다는 성실하고 철저한 개량주의자가 사회의 진보에 훨씬 더 기여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유진 기자 yjle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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