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넘어 몸까지 번진 분석 광풍…2030 여성 가두는 ‘체형 감옥’
유튜브에 ‘스트레이트 코디’를 검색해 봤다. 해당 체형이 피해야 하는 코디를 위주로 추천해주고 있다. 유튜브 화면 캡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살성 웨이브인데 체형이 스트레이트라 저한테는 안 어울리는 것 같아요. 스트레이트 분들은 이 옷 피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온라인 쇼핑몰 후기나 SNS에서 이런 조언을 발견하는 건 이제 일상이다. 특정 체형에게는 ‘입지 말아야 할 옷’이 존재하고, 체형에 맞지 않는 선택은 ‘실패’로 간주되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다. 내추럴, 웨이브, 스트레이트 등 체형을 나누는 기준은 피부의 강직도와 뼈의 크기, 근육의 위치, 무릎 높이까지 세밀하게 확장된다. 사람을 신체 부위별로 잘게 분해해 평가하는 방식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셈이다. 이들이 말하는 ‘체형에 맞지 않는다’는 표현은 결국 ‘말라 보이지 않는다’는 뜻에 가깝다. 날씬해 보이기 위해 특정 옷을 검열해야 한다는 조언은 옷을 입는 행위를 단일한 강박 속으로 밀어 넣는 기준이 된다.
이런 흐름은 이제 개인의 취향을 넘어 ‘외모 정병’이라는 신조어로 집약된다. 사소한 결점을 심각한 장애처럼 인식해 과도하게 집착하는 이 현상은 이미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다. 한때 퍼스널 컬러와 ‘중안부 정병’으로 대표되던 외모 분석 문화는 최근 얼굴을 넘어 몸 전체로 번졌다. 비싸게는 수십만 원을 들여 체형 분석을 받고, 허리가 가늘어 보이거나 목이 길어 보이는 실루엣을 ‘처방’받는다.
분석에서 멈추지 않고 신체를 ‘튜닝’하는 방식으로 이어진다는 점도 문제다. 각진 어깨를 만들기 위해 어깨 필러 시술을 받거나, 도드라진 승모근을 숨기기 위해 근육을 줄이는 시술까지 감수한다. 가뜩이나 근육량이 부족한 20대 여성들이 운동으로 근육을 늘려도 모자랄 상황에서, 오히려 ‘예쁜 핏’을 위해 몸을 교정하는 기묘한 풍경이 일상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러한 기준은 단순한 담론을 넘어 실제 패션 소비 구조까지 바꾸고 있다. 에이블리, 지그재그 등 여성 타깃 패션 플랫폼에서도 체형 보완을 전제로 한 스타일 제안이 반복되면서, 옷은 취향을 표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결점을 수정하는 도구로 전락했다. 결과적으로 소비자들은 ‘입고 싶은 옷’보다 ‘입어도 되는 옷’을 찾는 과정에서 스스로 선택지를 좁히게 된다.
물론 내 몸에 어울리는 옷을 찾고 싶은 욕구나 전문적인 분석 서비스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기준이 ‘정답’처럼 강요되는 순간, 정보는 또 다른 통제가 된다. 체형에 맞는 옷이라는 말이 오직 ‘더 가늘고 작아 보이기 위한 옷’으로만 수렴될 때, 패션은 즐거움이 아닌 자기검열의 도구가 될 뿐이다.
패션 플랫폼에서 판매 중인 의류에 ‘뼈말라 하체’, ‘-3kg’, ‘팔뚝소멸핏’ 등 말라 보이는 효과를 강조한 문구가 사용되고 있다. 패션 플랫폼 페이지 캡쳐 |
과거 ‘뼈말라’나 ‘개말라’ 같은 표현은 거식증을 동경하는 이들 사이에서나 쓰이던 병리적 징후였다. 적어도 당시에는 그것이 치료가 필요한 위험한 상태라는 사회적 경계심이 존재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경계선이 완전히 무너졌다. 건강을 해치는 가학적 감량조차 ‘자기관리의 정점’으로 포장되고, 위험 신호였던 마른 몸은 어느덧 찬사가 되어 마케팅 언어로 소비된다. 미디어의 방조 아래 최소한의 윤리적 울타리마저 허물어진 셈이다. 결국 도달 불가능한 기준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은 손쉽게 자기혐오로 번지고, 사회는 이 위험한 갈망을 이상적인 상태로 치부하며 방치하고 있다.
그렇다면 옷은 마른 사람이 입었을 때 가장 예쁠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마른 몸 위에서 디자이너가 의도한 실루엣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타인에게 가장 완벽한 형태의 의상을 소개하기 위해서 옷을 입는건 아니지 않은가. 어떤 옷은 기분을 바꾸고, 어떤 옷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또 다른 옷은 좋아하는 스타일을 입었다는 만족감 자체로 의미를 갖는다. 선택의 기준이 오직 ‘날씬함’으로 수렴될 때, 이런 본연의 즐거움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시대가 변하고 트렌드는 바뀌었지만 여성의 몸을 특정 규격에 끼워 맞추려는 강박만큼은 과거 ‘쓰리사이즈’(가슴·허리·엉덩이 둘레로 여성의 몸을 규격화하는 기준) 시절과 비교해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씁쓸하다. 정형화된 마네킹 몸매에 스스로를 가두는 프레임은 오히려 전보다 더 견고해졌다. 디자이너가 아무리 힙한 옷을 만들어내도, 각자의 개성대로 입는 문화가 이어지지 않는다면 거리의 풍경은 결코 다채로워질 수 없다.
정형화된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이른바 ‘美친’ 한국 사회가 확산시킨 외모 정병은 지금 이 순간에도 패션의 본질을 흐리고 있다. ‘뼈말라 팔뚝살삭제핏 골지니트’와 ‘허얇골넓 부츠컷 청바지’에서 벗어나, 여성들이 더 다양한 옷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란다. 체형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옷 자체의 고유 개성을 즐기는 분위기가 만들어질 때, 한국 패션도 비로소 좁은 틀을 깨고 진짜 자유로운 전성기를 맞이할 것이다.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