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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16 (월)

    이슈 미술의 세계

    눈 내리는 러시아, 타오르는 사랑…7년 만에 돌아 온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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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사 숙녀 여러분, 규칙을 지키세요. 안 그러면 신의 심판을 받습니다.”

    하얀 눈발이 흩날리는 기차역 플랫폼, 차가운 철제 구조물 사이로 엄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극은 시작된다. 객석이 어둠에 잠기자마자 관객은 19세기 러시아 귀족 사회의 차가운 공기 속으로 순식간에 끌려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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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나 역 이지혜와 브론스키 역 정승원의 공연 장면. 마스트인터네셔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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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는 19세기 후반 러시아 상류층 사회를 배경으로 사랑과 결혼, 가족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룬 톨스토이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작품은 사랑과 행복, 선택과 갈등에 대한 인류 보편의 고민을 유려한 음악과 감각적인 무대 연출 위에 올려놓고, 관객들을 타오르는 감정의 소용돌이 한가운데로 밀어 넣는다.

    안나는 정부 고위 관료 카레닌의 아내이자 상트페테르부르크 사교계의 중심 인물이다. 어느 날 오빠 스티바의 가정 문제를 수습하기 위해 모스크바행 열차에 몸을 싣고, 그곳에서 젊은 장교 브론스키를 만나 치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안정된 결혼과 사회적 체면,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아들 사이에서 안나는 갈가리 찢기듯 흔들리지만, 결국 브론스키와의 관계를 택한다. 그녀를 둘러싼 러시아 상류 사회의 차가운 시선과 도덕적 비난은 점점 거세지고, 사랑이었던 감정은 어느 순간 집착과 공포, 불안으로 뒤엉킨다. 끝내 안나는 기차역 플랫폼에서 기관차 앞으로 몸을 던지며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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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나 역 옥주현과 브론스키 역 문유강의 공연 장면. 마스트인터네셔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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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초연, 2019년 재연 이후 약 7년 만에 돌아온 <안나 카레니나>는 우리에게 다소 낯선 러시아 뮤지컬의 미학을 제대로 만날 수 있는 작품이다. 고전 발레와 클래식 음악, 문학을 꽃피운 러시아 특유의 예술적 감성이 작품 전체에 진하게 배어 있다. 특히 러시아의 긴 겨울을 그대로 옮겨 온 듯 차갑고도 드라마틱한 무대는 시선을 단단히 붙잡는다.

    이번 시즌에는 러시아 오리지널 프로덕션의 미장센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스케일에 맞게 확장했다. 4개의 LED 타워 구조물이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이야기의 핵심 배경인 기차역과 무도회장, 스케이트장과 경마장, 사교계 살롱, 안나의 저택과 황금빛 농촌 풍경까지 유려하게 펼쳐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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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 공연 장면. 마스트인터네셔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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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나 카레니나를 연기하는 옥주현. 마스트인터네셔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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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대 미술은 인물의 심리 상태를 시각화하는 장치로도 기능한다. 특히 기차는 안나의 운명을 상징하는 거대한 메타포다. 초반 눈송이가 흩날리는 낭만적인 플랫폼과 따뜻한 객차의 조명이 후반부로 갈수록 검은 철체와 웅장한 톱니바퀴, 석탄 냄새가 날 것 같은 굉음의 공간으로 변해가는 과정은, 파멸을 향해 돌진하는 안나의 내면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관객은 기차역의 전조등 아래, 한 인간의 인생이 서서히 탈선해가는 광경을 지켜보는 증인이 된다.

    러시아 특유의 격정적인 선율에 인물들의 섬세한 심리 변화와 감정을 실어낸 넘버는 브로드웨이나 서유럽 뮤지컬 넘버와는 결이 다른 매력으로 다가온다. 대사와 노래의 경계가 흐릿한 ‘송스루’에 가까운 인상도 있다. 보드카를 한 잔씩 계속 들이켜는 것처럼 진하고 강렬한 선율 속에 발라드 넘버조차 끝까지 힘을 빼지 않고 관객을 몰아붙인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점은 안나의 몸으로 쓰는 서사다. 이번 시즌 주인공 안나 역에는 옥주현, 김소향, 이지혜가 캐스팅됐다. 모두 강도 높은 감정과 가창을 요구하는 역할을 전면에서 이끌어 간다. 150분 러닝타임 동안 안나는 1막의 황홀과 2막의 붕괴를 몸으로 써 내려간다. 고음과 레가토를 쉼 없이 오가는 넘버 속에서 배우들은 단순한 성량이 아니라 호흡과 감정의 결을 촘촘히 엮어가며 비극의 무게를 견뎌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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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 <안나 카레리나> 공연 장면. 마스트인터네셔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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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후반부, 안나가 오페라홀에서 성악가 ‘패티’의 아리아를 들으며 마지막 선택을 향해 나아가는 장면은 극 전체를 관통하는 클라이맥스로 기억될 만 하다. 오페라 극장 한복판, 모든 것을 잃은 안나를 감싸듯 포근하면서도 황홀하게 울려 퍼지는 패티의 노래 ‘오 나의 사랑하는 이여’는 환희와 절망의 경계 어딘가에 버려진 안나의 고통과 외로움을 관객의 가슴 깊숙이 밀어 넣는다.

    짧지 않은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브론스키와 사랑에 빠지는 안나의 감정선이 무대에서는 다소 급박하게 전개된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원작이 아닌 뮤지컬로 안나를 처음 만나는 관객에게는, 왜 안나가 모든 것을 걸 만큼 이 사랑에 매달리는지, 내면의 균열이 어느 지점에서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는지 충분히 설득되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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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나 역의 김소향, 브론스키 역의 윤형렬의 공연 장면. 제공 마스트인터내셔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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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 <안나 카레리나> 공연 장면. 마스트인터내셔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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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에도 작품은 삶과 사랑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사회적 규범밖으로 과감히 발을 내디딘 한 여인이 추락하는 사이, 관객은 한 인간이 도달하고자 했던 행복과 비극적 결말을 곱씹으며 객석을 나서게 된다. 눈 내리는 기차역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막이 내린 뒤에도 한동안 마음속 플랫폼 위를 서성인다. 오는 3월29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공연한다.

    노정연 기자 dana_f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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