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미 스포츠부 기자 |
피겨스케이팅 선수들은 올림픽 메달 주인이 결정된 뒤에도 한데 모여 스케이팅을 한다. 승부와 관계없이 인상 깊은 연기를 펼친 선수들은 모두 갈라쇼 무대에 초대받는다. 올림픽이 블록버스터 영화라면 갈라는 스핀오프다. 관중은 선수들이 올림픽에서 보여줬던 무대에 이어 갈라를 보게 된다.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겨울올림픽 피겨 남녀 싱글에서 유력한 금메달 후보로 꼽혔던 일리야 말리닌과 앰버 글렌은 실전에서 평소 전혀 하지 않던 실수를 연발하며 메달 경쟁도 못 해보고 대회를 마쳤다.
하지만 갈라 무대를 통해 못다 한 이야기를 마저 할 수 있었다. 글렌은 레이디 가가의 ‘That‘s life(그것이 인생)’의 ‘Many times I thought of cutting out but my heart won’t buy it(몇 번이고 그만둘까 했지만 내 맘이 그러질 못해)’ ‘Each time I find myself flat on my face I pick myself up and get back in the race(바닥을 찍을 때마다 나는 다시 도전해)’ 노랫말에 맞춰 연기했다. 쇼트프로그램에서 예상치 못한 실수를 하고 빙판에서 눈물을 쏟았던 글렌이었기에 더 큰 울림을 줬다.
쇼트프로그램 1위였던 말리닌 역시 이번 프리스케이팅에서 커리어 최악의 연기를 하며 포디움에도 오르지 못하는 이변의 희생양이 됐다. 하지만 말리닌은 누구보다 앞장서 갈라 무대를 빛냈고 밀라노 아이스 스케이팅 아레나를 채운 만원 관중은 그에게 기립박수를 보냈다.
4위로 아쉽게 메달을 놓친 한국 남자 싱글 차준환도 송소희의 퓨전 국악 ‘Not a dream(꿈이 아니야)’에 나오는 ‘꿈이 아니야 나의 날 온 거야’라는 노랫말에 맞춰 꿈의 무대에 서게 된 감격을 전했다. 차준환은 여자 싱글 니나 페트로키나의 무대 때는 카메오로 출연해 독살을 당하는 열연을 펼치기도 했다.
이런 모습은 올림픽 본 경기에서는 절대 볼 수 없다. 대회 기간에는 경기 전 환하게 웃는 선수도 찾기 어렵다. 모두가 극도의 긴장 속에서 연기하기 때문이다. 반면 갈라에서는 모두가 200% 올림픽을 즐긴다. 갈라는 메달을 딴 선수건, 그러지 못한 선수건 모두가 환하게 웃으며 떠날 수 있는 유일한 무대다.
갈라만큼은 미디어석이 아닌 관중석 쪽에서 본 기자는 이날 3층 객석에서 미국 방송사 스포츠 PD 출신 알렉시스 씨를 만났다. 갈라를 보기 위해 100만 원이 넘는 티켓을 사서 입장한 그는 “다른 종목에서도 이런 걸 해야 한다. 선수들 모두가 행복해하는 표정으로 같이 즐기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다”고 했다.
그의 말처럼 갈라는 어떻게 보면 ‘화합’이라는 올림픽 정신을 가장 잘 보여 줄 수 있는 무대다. 하지만 다른 종목의 경우 여러 국가에서 온 선수들이 한데 모여 어울릴 기회를 찾기 어렵다. 종목을 대표하는 선수들이 같은 기간 한 장소에 모이는 건 올림픽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라는 점에서 아쉬운 일이다.
올림픽이 주는 감동은 꼭 극한의 한계를 넘어서는 초인적 모습에만 있지 않다. 자신의 대기록을 무산시킨 후배에게 기꺼이 박수를 보낸 최민정과 클로이 김(미국), 자신이 메달권에서 밀릴지언정 점프 실수를 한 가기야마 유마(일본)를 향해 응원의 박수를 보내던 차준환이 그랬다. 다른 종목 선수들에게도 올림픽 무대에서 같은 꿈을 꾸는 이들과 함께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기회의 장이 마련되길 바란다.
임보미 스포츠부 기자 b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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