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은 "나는 당신의 아담(Adam)이 돼야 했다"며 자신을 인간이 아닌 괴물로 창조한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책임을 묻고 '애프터서비스'를 요구한다. 하나님이라는 창조주는 아담을 번듯한 인간으로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애프터서비스로 그의 짝 이브를 만들어주는 책임을 다했다. 그러나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흉측한 모습으로 태어난 피조물을 팽개쳐 버린다.
영화 속 프랑켄슈타인은 상황논리로 자신의 잘못을 벗어나려 한다.[사진|더스쿠프 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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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괴물은 당연히 받아야 할 애프터서비스마저 거부하는 프랑켄슈타인에게 복수를 한다. 동생을 죽이고 약혼녀도 죽여 버린다. 프랑켄슈타인 박사도 분노한다. 그러면서 프랑켄슈타인 박사와 괴물의 '개싸움'이 시작된다.
그러나 사실 괴물이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동생, 그리고 약혼녀를 죽이는 상황을 만든 것은 창조 직후 실망감에 휩싸여 괴물을 버리고 도망쳐버린 프랑켄슈타인 자신이었다. 그는 본인이 만든 상황을 도리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상황논리'의 원인으로 삼는 '순환논리의 함정'에 빠져버린다.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자신이 괴물을 인정 안 하고 버린 이유, 그리고 종국에는 괴물을 죽이러 나선 이유를 모두 자신의 피조물인 괴물이 자신의 기대에서 벗어났다는 상황논리, 그리고 '가족의 안위'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는 상황논리로 자신을 정당화하고 자신의 책임을 괴물의 책임으로 돌려버린다.
메리 셸리가 그린 이 비극의 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있었던 것일까. 소설의 원작자 메리 셸리와 감독 델 토로는 각각 자신의 독자들과 관객들을 배심원석에 앉히고 괴물이 고발한 프랑켄슈타인의 유무죄를 판단하라고 하는 듯하다.
서구의 독자들이나 관객들은 아마 대부분 프랑켄슈타인 박사를 유죄로 평결했을 듯하다. 그러나 동양의 독자들이나 관객들의 반응은 이와는 다르게 전후사정을 살펴보면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처한 상황도 이해할 만하다고 무죄 쪽으로 기울지도 모르겠다.
물론 비판도 많지만,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Edward Hall)이 그의 「문화의 해석(Beyond Cultureㆍ1976년)」에서 보여주는 동서양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의 차이는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홀(Hall)은 동양을 '고高맥락(High-Context) 사회', 그리고 서양을 '저低맥락(Low-Context) 사회'로 규정한다.
간단히 말하면 동양적 사유체계는 누군가의 잘잘못을 그가 처한 상황의 전후맥락을 살펴서 판단하는 반면 서양은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은 고려하지 않고 오직 그 사람이 '자기 책임성의 원칙'에서 벗어났는지 여부만 판단한다고 한다.
내란 우두머리 재판을 진행한 지귀연 재판부의 선고를 두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사진|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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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가 애를 배도 (애를 밸 수밖에 없었던 피치 못할 상황이었다는) 할 말이 있고, 핑계 없는 무덤이 없는 곳이 한국, 중국, 아랍권과 같은 고맥락 사회다. 재미있는 실험결과도 있다. 어느 미국 대학에서 동서양 학생들을 모아놓고 '숲속의 호랑이' 그림을 보여주고 그 그림에서 본 것을 말해보라고 했더니 서양 학생들은 호랑이를 묘사하는데, 동양 학생들은 조금 엉뚱하게도 호랑이보다도 그 배경을 더 자세히 묘사했다고 한다.
그 '배경'이 바로 상황(situation)과 맥락(Context)이다. 사건의 본질보다는 오히려 그 배경에 더 관심을 갖는 것을 '상황론(contextualism)'이나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가 처한 상황이 결정한다는 '상황결정론(Context determinism)'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프랑켄슈타인」을 읽어도 서양 독자들은 프랑켄슈타인이 창조주로서의 본연의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는 '원칙'에 집중한다면, 동양의 독자들은 프랑켄슈타인이 책임을 '거부ㆍ도피'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얼마 전 법원에서 '내란 우두머리' 전직 대통령에게 무기징역이라는 1심 선고를 내렸지만 많은 국민들은 사형선고가 내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황당해한다. 재판부는 검사가 요구한 사형을 무기징역으로 경감한 상황논리의 사유를 '초범' '고령'을 내세운다.
'심신 미약'이라면 그러려니 할 수도 있겠지만, 반성도 없는 내란 우두머리 재판에서 "고령과 초범인 점을 감안했다"는 판결문은 퍽이나 당황스럽다. 그야말로 경감 사유를 '영끌'한 느낌이다. 법정이 놀이동산도 아닐 텐데 고령자 할인 혜택도 요령부득이지만, 내란도 세번쯤 해야 '삼진아웃제'를 적용해서 가차 없이 단죄할 모양이다.
당사자인 내란 우두머리는 한술 더 뜬다. "미안하기는 한데, 계엄은 구국의 결단이었다"고 계엄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들이댄다. 처녀가 애를 배도 할 말이 있는 고맥락 사회이니 대통령이 내란을 일으켜도 할 말이 있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
내란 우두머리를 배출한 정당의 대표는 여전히 법원 판결을 비난하고, 야당이 국정의 발목을 잡았던 당시 상황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비분강개한다. 가끔은 죄인이 오히려 큰소리치고, 사법부가 피해자보다 가해자를 두둔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고맥락 사회가 연출하는 어리둥절한 모습이다.
만약 이 재판이 미국 법정에서 진행됐다면 상상하기 힘든 결과다. 서구 영미법 사법체계에도 작량경감이라는 규정이 '자율완화(Discretionary Mitigation)'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 적용폭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세계 각국의 대법원 앞에는 눈을 가리고 한 손에는 저울, 또 다른 한 손에는 칼을 든 여신의 상이 자리 잡고 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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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가 엿장수처럼 재량을 남발할 수 없도록 '양형기준표(Sentencing Guideline)'를 정교하게 짜놓아 심신미약이니 고령이니, 반성하고 있다느니 하는 상황론이 개입할 여지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원칙을 따른다. 그래서 몇백년 징역이라는 우리가 보기에는 초현실적인 선고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세계 각국의 대법원 앞에는 그것이 만국 공통의 법원 상징물인 것처럼 눈을 가리고 한 손에는 저울, 또 다른 한 손에는 칼을 든 여신의 상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정의의 여신인 '유스티티아(JustitiaㆍJustice)'다.
눈을 가린 이 여신은 에드워드 홀 식으로 말하자면 "정의는 죄 지은 자의 구구절절한 사정(context)을 보지 않고 그 죄의 무게를 오직 저울 위에 놓인 법전에 따라 재어보겠다"는 저맥락적 판단의 상징과도 같다.
죄인이 저지른 죄의 온갖 전후맥락과 죄인이 처한 상황까지 꼼꼼하게 살피고 감안해주는 우리나라 대법원 앞에도 서양의 그것과 똑같은 형상의 '정의의 여신상'이 있다. 지금 진행 중인 내란 재판이나 끝없이 반복되는 '감형' '사면'과 '복권', 그리고 '석방'을 지켜보노라면 그 모습이 갓 쓰고 오토바이 탄 노인네 모습처럼 어설프고 '맥락' 없어 보인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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