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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02 (월)

    [NGO 현장]민주주의의 보루, 상호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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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주의는 통치자의 선의에 기대지 않는다. 대신 권력에 대한 중첩적인 견제 장치를 둔다. 행정부·입법부·사법부 간 상호견제를 비롯해 정당 간 견제, 정당 내 견제(파벌), 시민들의 자유로운 선거 참여와 저항, 사회운동이나 언론의 감시·비판 활동 등이 대표적이다. 촘촘하게 포개진 이 장치들의 원활한 작동은 민주주의의 척도이자 본질이다. 따라서 표현의 자유나 집회·결사의 자유는 반대 의견을 형성하고 전파할 수 있는 핵심적인 권리일 수밖에 없다. 권력교체가 공정하고 자유롭게 이뤄지기 위한 선거제도도 그렇다. 그래서 이러한 권리나 제도는 기본권으로 헌법에 보장되며 특정 정당에 의해 독단적으로 변형되어선 안 된다. 윤석열의 계엄 선포가 반민주적이었던 이유도 물리적 강압 수단을 통해 국가의 견제 기능을 일거에 정지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견제는 다수의 횡포를 보완하는 측면도 있다. 흔한 오해와 달리 민주주의는 다수주의에만 기반하지 않는다. 우리는 소수에 대한 다수의 억압을 막거나 법의 지배라는 근간이 흔들리지 않도록 다양한 비다수주의적 장치를 두고 있다. 헌법재판소나 사법부가 대표적이며 선관위, 상원(미국 등) 같은 기구들이 그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출된 권력이 더 우위”에 있다는 이재명 대통령의 말은 틀렸다. 무엇이 우위에 있다기보단 여러 제도 간 상호견제의 원리가 민주주의에서 더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입법부가 민의를 대표하는 데 실패하면서 신뢰를 잃듯 사법부 등 비다수주의 제도들 또한, 민주적 정당성을 결여한 채 통치나 입법 활동을 제한하거나 과도하게 개입함으로써 신뢰를 잃는다. 우리 사법부 역시 사법불신을 자초하며 민주적 통제를 강화하거나 사법적 기본권을 보장하는 개혁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러나 최근 여당이 강행 처리한 ‘사법개혁 3법’은 사법정의의 회복이라는 취지에도 불구하고 우려를 낳고 있다. 법왜곡죄는 ‘법의 지배’가 ‘법관의 지배’로 변질되는 것을 막겠다는 취지라지만 왜곡의 기준이 모호해 정치적으로 악용돼 혼란만 부추길 소지가 크다. 대법관 증원법 또한, 충원구조와 다양성이 핵심인데 특정 정치세력이 단기간에 과반수의 대법관을 임명할 수 있어 ‘법원 장악’을 시도한다는 의구심을 지우기 어렵다.

    절차적 완결성이 훼손된 채 밀어붙여지는 개혁은 정치적 목적에 따른 ‘사법부 길들이기’로 비칠 수밖에 없다. 곧장 이어지는 대법원장 사퇴나 탄핵 거론이 이를 방증한다. 압박이 누적될수록 사법부는 정치에 종속되거나 순응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상호견제 기능은 축소될 것이다. 사법부 억압은 민주주의 국가를 서서히 ‘경쟁적 권위주의’(레비츠키)로 향하게 한다. 사례로 알 수 있듯 민주주의 퇴행은 사법부와 같은 비다수주의 장치들이 특정 정치세력이 장악한 다수주의 장치에 잠식되면서 벌어졌다.

    견제 장치들이 조용히 허물어지는 것은 민주주의 퇴행의 신호다. 윤석열 정부 시기, 겉으로는 권력 간 상호견제가 이어졌으나 실제로는 민주적 규범을 형해화하는 적대적 동원체제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제는 더불어민주당이 입법부와 행정부를 모두 장악한 가운데, 사법부까지 가시권에 둔 듯하다. 상호견제의 핵심축이 되어야 할 야당은 사실상 기능을 상실했다. 다시 말하지만, 민주주의는 선의에 기반하지 않는다. 전 세계가 ‘트럼프를 누가 견제할 것인가’를 묻고 있듯, 우리는 정부·여당을 누가 견제할 것인지 질문해야 한다. 시민시회 역시 이 물음에 책임 있게 답해야 한다.

    경향신문

    김건우 참여연대 정책기획국 선임간사


    김건우 참여연대 정책기획국 선임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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