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한국문학관이 지난 25일 서울 은평구 문학관 자료실에서 ‘파리장서’ 원본을 언론에 공개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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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에 서울의 유림 대표들은 참여를 거절했다. 일제 작위까지 받은 그들이 참여할 리는 만무했다. 유림은 큰 충격을 받았다. 공의를 중시하는 유학자들이 독립 대의에 함께하지 않은 건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 자각으로 전국의 유림은 프랑스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해 독립을 호소하는 거사를 도모했다. 그 독립청원서가 한자음 ‘파리(巴里)’에 2674자 긴 글이란 ‘장서’를 더한 ‘파리장서’다.
국립한국문학관은 지난달 25일 ‘파리장서’ 원본을 처음 공개했다. 조선 성리학의 마지막 거목인 면우 곽종석의 친필인 ‘면우본’이다.
파리장서는 심산 김창숙 등 고종의 인산(국장)일을 맞아 상경한 ‘경중유림’이 주도했다. 이들은 팔도 유림의 뜻을 모으기로 하고, 그중 김창숙이 스승인 곽종석에게 청원서 작성을 청했다. 곽종석은 응낙하며 “내가 망국의 대부가 되어 항상 죽을 땅을 얻지 못함을 슬퍼하였다”고 했다(‘디지털거창문화대전’). 면우는 청원서가 들키지 않도록 한 줄씩 잘라 끈처럼 꼰 뒤 미투리(짚신) 한 켤레를 삼아 먼 길을 떠날 제자 김창숙에게 주었다고 한다.
장서는 ‘문명의 나라’ 한국의 자치 능력을 밝히고, ‘사기와 포악한 수법으로 독립을 보호로, 보호를 병합으로 바꾼’ 일제의 무도함을 폭로하며, ‘만국평화회의가 한국인 2000만의 처지를 통찰해줄 것으로 믿고 있다’는 호소를 담았다. ‘조선’을 ‘한국’으로 표현하고 화이관(華夷觀)에서 벗어나 새로운 국제질서를 수용한 것으로 당시 유림으로선 파격적이었다.
파리장서는 3·1운동 확산 과정에서 일제에 발각됐다. 곽종석은 2년형을 선고받고 투옥 중 1919년 8월 순국했다. 일본인 재판관이 항소 뜻을 묻자 곽종석은 거절했다. “나는 공소할 곳이 없다. 국가를 위해 이 일을 했는데 결국 국가 흥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구나. 구구하게 내 한 몸 때문에 원수에게 동정을 빌어야 하겠는가? 꼭 공소를 한다면 하늘뿐이다.”
어떤 이는 파리장서를 보며 한 사회 지도 세력이면서도 망국을 막지 못한 유림의 ‘회한’을, 어떤 이는 개인으론 어쩔 수 없는 역사의 압력에도 맞섰던 ‘절의’를 볼 것이다. 그 선택이 오늘의 역사를 사는 이들의 갈림길이 될 것이다.
김광호 논설위원 lubof@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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