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는 베스트셀러. 창작자들은 자신이 만든 콘텐츠가 베스트셀러가 되길 꿈꾸지만, 실제로 실현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이 희귀한 확률을 뚫고 베스트셀러가 된 콘텐츠가 탄생한 과정을 들여다본다. 창작자의 노하우를 비롯해 이 시대 사람들의 욕망, 사회 트렌드 등을 확인할 수 있다.
대학에서 영문학과 정치학을 공부한 후 일자리를 구하려 300곳에 지원했다. 헤어드라이기 조립 업체, 소시지 제조사, 호텔, 꽃집, 청소업체…. 모조리 떨어졌다. 고민하다 문예창작 석사 학위를 받고 글쓰기를 가르치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20여 년 전 그의 글에 매료됐다. 번역가로도 활동하는 하루키는 자신이 엮은 영미문학선집에 그의 단편 ‘물가 가까이’를 실었다. 하루키는 “꾸밈없는 단어와 문장들의 조합으로 만들어내는 단순한, 그러나 따뜻하고 심오한 장면들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그가 쓴 중편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 ‘맡겨진 소녀’는 영화로 제작됐다. 아일랜드 소설가 클레어 키건(58)이다.
아일랜드 소설가 클레어 키건. Philippe Matsa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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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건의 데뷔작인 단편 소설집 ‘남극’(허진 옮김·다산북스)이 지난해 12월 국내 출간됐다. 이로써 소설집 ‘푸른 들판을 걷다’, ‘너무 늦은 시간’까지, 1999년 데뷔해 27년간 단 5권을 낸 키건의 작품이 국내에 모두 소개됐다. 다섯 책의 누적 판매량은 30만 권 가까이 된다. ‘남극’도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국내에 키건 열풍을 불러일으킨 이승환 다산북스 콘텐츠사업3팀장(41)을 지난달 26일 경기 파주시 다산북스에서 만났다. 인문·에세이를 담당하는 콘텐츠사업3팀을 맡은 그는 2021년 현지 출간돼 영미권에서 큰 호평을 받은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 마음을 뺏겼다. “작품성은 있지만 대중성이 없다”는 주위 평가에도 이상하게 포기가 안 돼 혼자 끙끙 앓다 출간을 시도했다. 결과는 대성공. 키건 작품을 모두 내는 여정이 4년 만에 마무리됐다.
“일단락이 돼 뿌듯해요. 하지만 마침표는 아니길 바랍니다. 키건이 농장을 배경으로 한 여성이 나오는 장편 소설을 쓰고 있거든요. 키건은 1년에 평균 10페이지를 쓰는 작가(최종 원고 기준으로, 불필요한 내용을 덜어내고 글을 정교하게 배치하는데 오랜 시간 공을 들인다)라서 언제 완성될진 모르겠지만 그 책도 꼭 내고 싶어요.”
클레어 키건의 데뷔작인 소설집 ‘남극’. 다산북스 제공 |
이 팀장이 편집자로 일하며 만든 책 중 키건의 작품들은 예스24, 알라딘을 비롯해 각 서점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는 등 사회적 반향은 물론 매출에서도 단연 최고의 성과를 냈다. 이 팀장은 “문학 전문 출판사에서 근무한 적이 있어서 문학책을 내고 싶은 욕구가 있었는데 이를 다 채웠다”며 웃었다.
‘남극’에는 남편 몰래 낯선 남자와 육체적 관계를 맺는 여성(‘남극’), 평범한 이웃이 연쇄살인범이었음을 알게 된 자매(‘노래하는 계산원’), 동생에게 늘 희생해 온 언니(‘자매’), 엿새 간의 유희로 인해 임신한 여성과 이를 외면하는 남성(‘남자애한테는 이상한 이름’), 딸을 잃어버린 부부(‘여권 수프’) 등 15개 단편이 실렸다.
예리한 시선, 정교한 묘사, 군더더기 없는 문장, 뜻밖의 반전 등 날 것 그대로 서늘한 키건 특유의 색채가 담겼다. 다섯 딸을 둔 펄롱이 막강한 권력을 가진 수녀원에서 학대당하는 소녀로부터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고 고뇌하는 내용을 담은 ‘이처럼 사소한 것들’, 형제가 많아 방치된 소녀 코오트가 엄마의 출산으로 여름 동안 먼 친척 부부의 집에서 지내며 처음으로 따뜻한 보살핌을 받는 ‘맡겨진 소녀’가 피어난 씨앗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다. 데뷔작을 맨 마지막에 낸 이유가 있을까.
“우연입니다.(웃음) ‘이처럼 사소한 것들’, ‘맡겨진 소녀’가 히트를 친 후 여러 출판사들이 ‘푸른 들판을 걷다’를 구매하기 위해 나섰다고 해요. 에이전시에서 저희 출판사에 ‘키건의 책을 먼저 냈으므로 판권 매입 우선권이 있다’고 해서 바로 계약했습니다. 그 뒤에도 마찬가지 상황이 벌어져 남은 두 책의 판권을 샀죠. 다행히 그리 비싸진 않았습니다.”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서 다섯 딸을 둔 펄롱(킬리언 머피)은 수녀원에서 학대받는 소녀가 도움을 요청하자 고뇌한다. 클레어 키건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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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만에도 “문학은 끝난다”는 이른바 ‘문학 패배주의’가 강했다. 하지만 최근 2, 3년 들어 문학은 출판사의 매출을 올려주는 효자 장르로 탈바꿈했다. 문학의 부상에는 키건의 작품들도 큰 역할을 했다.
“허진 번역가님이 ‘키건은 세상에 존재하는 불협화음을 잘 포착하는 작가다. 하지만 그 시선이 나약하지 않다. 강하다’고 했어요. 키건이 이미 20대에 그런 면모를 갖고 있었다는 걸 ‘남극’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남극’에서 드러난, 잘 벼린 차가운 칼날 같은 키건의 시선은 시간이 지나며 예리함은 유지하되 점점 온기가 더해지는 걸 ‘이처럼 사소한 것들’, ‘맡겨진 소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키건은 보살핌을 중요한 가치라고 말한다. 그는 호주 공영방송 ABC와의 인터뷰에서 “누군가의 보살핌과 관심을 받는 건 어린 시절 뿐만 아니라 아내 혹은 남편이 되어서도,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노인이 되어서도 늘 필요하다. 가족처럼 가까이에서 지내는 사이가 아니어도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키건의 작품 세계는 삶의 궤적과도 맞물린다. 키건은 가난한 집의 6남매 중 막내였다. 집에는 수도 시설도, 책도 없었다. 키건은 조랑말을 타고 들판에서 뛰어놀며 자신을 인디언이라고 상상했다.
키건은 고등학생 때 아일랜드에 여행 온 부부의 아이를 돌봤는데, 그를 눈여겨 본 부부가 미국으로 가 아이를 봐주고 집안일을 해주면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렇게 해서 키건은 미국 로욜라대학에서 영문학과 정치학을 공부할 수 있었고 도서관에서 책에 빠져 지냈다. 키건 자신이 ‘맡겨진 소녀’였던 셈이다.
영화 ‘말없는 소녀’에서 형제가 많아 방치된 코오트(캐서린 클린치)는 엄마의 출산으로 먼 친척 부부에게 맡겨지면서 처음으로 보살핌을 받는다. 클레어 키건의 소설 ‘맡겨진 소녀’가 원작이다. 슈아픽처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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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마친 후 아일랜드로 돌아왔지만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지원한 300곳에서 모두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웨일스대학에서 문예창작 석사 학위를 받고 글쓰기를 가르쳤다. 그는 “무언가를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르치는 것”이라며 수업에 대한 애정을 표했다. 글에 대해 키건은 “아름다운 문장을 쓰는데 관심 없다. 문단을 수정하고 배치하는데 집중한다. 핵심은 글의 구조다.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고 말한다.
‘남극’은 하얀 털에 파란 눈을 가진 고양이 사진을 표지로 썼다. 강렬하다. 키건이 직접 고른 사진이다. 이 팀장은 “키건은 이미지에 강한 작가”라고 말한다.
“작품을 읽다보면 머릿속에 선명한 그림이 그려지죠. 키건은 책 표지에 대해서도 기준이 분명하다고 해요. ‘이처럼 사소한 것들’과 ‘너무 늦은 시간’ 표지도 키건이 직접 고른 회화 작품을 썼고요.”
그는 ‘푸른 들판을 걷다’가 단편 영화로 제작될 예정이어서 영화가 개봉하면 키건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지길 기대했다. 또 다른 아일랜드 작가의 작품도 소개할 예정이다.
“아일랜드는 문학적 토양이 풍부하고 그 뿌리도 깊은 나라입니다.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위대한 작가가 많아요. 떠오르는 신인 작가의 작품도 발굴하고 싶어요. ‘넥스트 키건’을 찾고 있습니다. ‘아일랜드 문학은 다산이 제일 잘하지’라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웃음)”
■ ‘남극’(다산북스·2025년)은….
아일랜드 작가 클레어 키건(58)의 15개 단편을 담은 소설집이다. 첫 책으로 1999년에 냈다. 부부, 자매, 남녀를 비롯해 이웃 간에 벌어지는 균열을 포착한다. 부조리한 상황엔 단호하게 단절을 표한다.
표제작 ‘남극’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일탈을 시도하는 이야기다. 혼자 다른 도시로 여행 온 여자는 술집에서 만난 남자의 집으로 가 욕망을 채운다. 남편이 아닌 남자와의 잠자리에 대한 호기심을 해소한 여자는 집으로 돌아가려하지만 다시 그의 집에 가게 되고 뜻밖의 상황이 벌어진다.
위험은 평범한 일상 옆에 똬리를 틀고 있다. 우체부와 즐길 시간을 갖기 위해 동생을 심부름 보내는 언니. 같은 마을에 사는 남자가 연쇄살인범이었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린다. 아버지는 벽돌공인 그를 집으로 데려와 저녁 식사를 하기도 했다. 유희를 위해 동생을 위험했던 거리로 내몰았던 언니는 우체부와 바로 헤어진다.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언니에게 동생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건다.(‘노래하는 계산원’)
아내와 딸에게만 늘 허드렛일을 시키고, 온 가족이 참석한 마을 파티에서 젊은 여자와 어울리는 남자. 꾹꾹 참기만 하던 아내는 더 이상 남자의 말을 따르지 않겠다는 선언을 행동으로 표한다.(‘남자와 여자’)
항상 희생해 오던 언니는 선을 넘는 동생을 단호하게 응징하고(‘자매’), 오래 살던 집을 철거하고 개발을 진행하려는 시에 맞서던 할머니는 자기만의 방법으로 집을 처리하는(‘불타는 야자수’) 등 주저앉지 않고 현실에 맞서는 이들도 있다. 도저히 되돌릴 수도, 용서를 바랄 수도 없는 불행이 존재하는 상황도 직시한다.(‘여권 수프’) 새 엄마와 서먹한 세 아이, 그리고 남자는 시골집에서 쏟아져 나오는 바퀴벌레를 맹렬하게 잡으며 하나가 된다.(‘화상’)
짧은 이야기들은 삶의 각 단면을 잘 벼린 칼로 망설임 없이 베어낸 듯하다. 킬리언 머피가 주연한 영화로 만들어진 ‘이처럼 사소한 것들’, 역시 영화로 제작된 ‘맡겨진 소녀’(영화 제목은 ‘말없는 소녀’)를 읽은 이라면 이들 작품이 태어난 원류를 발견하는 기분이 들 것 같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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