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세한탄 배틀 "우리는 전생에 분명 말로 사람을 죽게 만들었을 거예요." 로펌 회의실 테이블 너머, 퀭한 눈을 한 동료 변호사가 툭 던진 말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쩌면 조선 시대 사색당파의 중심에서 사화를 일으키고 선비들의 피를 뿌리게 했던 어느 가문의 '아가리 파이터'였을지도 모르지…" 우린 매일 누군가의 말과 글에 고통받고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농담 반 진담 반의 신세한탄 배틀이 벌어졌다.
그 와중에도 스마트폰은 쉴 새 없이 울려대며 대화의 맥을 끊어놓았다.
그렇다고 대화가 크게 방해받지 않았다.
잠깐의 단절이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우린 늘 그렇게 사는 것에 익숙해진 상태였다.
불교에서는 전생의 업(業)이 현재의 삶에 영향을 준다고 했던가.
끊임없는 말로 고통받는 것을 보면 변호사들이 현생에 변호사가 된 까닭은 전생의 전생에 쌓은 '구업(口業)'의 대가임이 분명했다.
업보다.
나무아미타불… 재판과 상담같은 예상되는 업무는 물론이고 낮, 밤, 식사 시간을 시간을 가리지 않는 날 선 감정이 실린 업무 전화들이 나의 일상을 채운다.
나같은 송무 변호사들은 매일 누군가의 서슬 퍼런 말과 글에 영혼을 갈아 넣으며 하루를 보낸다.
#2 적자 송무 변호사로 산 지 어느덧 십수 년이다.
이 정도 바닥에서 굴렀으면 빌런들의 공격에도 '사람이 그럴 수 있지' 하며 유연하게 넘길 법도 하건만, 가끔 누군가의 말과 글이 임계점을 넘어오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면 전생의 악업까지 끌어들이지 않고서는 이 멜랑꼴리한 기분을 설명하기 어렵다.
세상은 승소의 짜릿함을 묻지만, 사실 그 느낌이 쾌감인지는 잘 모르겠다.
승소의 기쁨은 말 그대로 순간 '짜릿'하고는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그 감정의 실체 또한 '좋다'라기보다는 '다행이다'에 가깝다.
이 애매한 안도감을 얻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는 너무도 가혹하다.
콩이 메주가 되고, 그 메주가 된장이 되어 식탁에 오를 만큼 긴 시간 동안 변호사는 말과 글에 영혼을 저당 잡힌다.
짜릿함의 총량과 갈려 나간 세월은 결코 등가가 될 수 없다.
감정의 장부를 기재해본다면 이건 명백한 수지상 적자다.
#3 인간혐오 변호사는 본질적으로 타인의 갈등 한복판에 서는 직업이다.
누군가의 불행이 나의 일감이 되고, 누군가의 악의를 파헤치는 것이 일과가 된다.
사실 법정에서 마주하는 상대방의 비열함이나 거짓말은 견디기 쉽다.
적어도 그들은 '이겨야 할 상대'라는 명확한 명분이라도 있기 때문이다.
나를 정말 깊은 허무로 밀어 넣는 것은 정작 '우리 편', 즉 내 의뢰인의 바닥을 목격할 때다.
억울함을 호소하며 내 손을 잡았던 그 손에 실은 추악한 욕망이 묻어 있음을 알게 될 때, 진실을 위해 싸워달라던 간곡한 부탁이 실은 상대방을 무너뜨리기 위한 잔인한 도구였음을 깨닫게 될 때, 나는 지독한 인간혐오를 느낀다.
해를 거듭할수록 내 마음속에는 사람에 대한 신뢰 대신 환멸의 찌꺼기가 두껍게 쌓여간다.
#4 고생했네 얼마 전, 사무실에서 동료와 커피를 마시다 요즘 변호사 드라마에 푹 빠진 둘째 딸아이 이야기를 꺼냈다.
나를 쏙 빼닮은 아이가 부쩍 변호사라는 직업에 관심을 보인다는 말에, 동료는 들고 있던 컵을 내려놓으며 화들짝 놀라 물었다.
"둘째가 변호사님이 성격이 똑닮았던데.
아이가 정말 힘들어 할텐데… 세상에.
그걸 안 말리실 거예요?" 그녀의 반응은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걱정이야.
나는 녀석이 그냥 아주 보통의 하루로 인생을 채웠으면 좋겠어." 진심이었다.
아이는 나에게 변호사가 무슨 일을 하느냐고, 정말 드라마나 영화처럼 멋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최대한 감정을 걷어내고 객관적으로 법조인의 역할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이 길은 사람의 가장 어두운 그림자를 매일 마주해야 하는 길이라는 어려운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대신 알아듣기 쉽게 매일 배신당하고 산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아이는 내 기색을 살피더니 한마디 짧게 했다.
"고생하네".
위로가 됐다.
이런 아주 단순한 위로가 위태로운 환멸의 늪에서 나를 건진다.
#5 다시 사람 하지만 이 짓을 십수 년째 하면서도 환멸의 늪에서 나를 잃지 않은 힘은 역설적이게도 다시 '사람'이었다.
한번은 퇴근길 식당에서 수년 전 이혼 소송 끝에 겨우 아이의 양육권을 지켜냈던 한 의뢰인과 마주쳤다.
사실 처음에는 반갑게 다가오는 그를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현재의 환한 얼굴에서 소송 당시 잿빛 얼굴을 떠올리기에는 무리였다.
그는 연신 감사를 표하며 자기 인생에서 가장 암울했던 시절에 내가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었었고, 덕분에 지금 아이와 정말 행복하게 잘살고 있다고 했다.
그 짧은 감사 인사가 식어버린 국밥처럼 차갑던 내 마음을 순식간에 데웠다.
길거리에서, 혹은 사적인 모임에서 마주치는 그들의 "덕분에 살았습니다"라는 한마디가 쌓여 있는 인간혐오같은 부정적 감정을 날려 버리곤 한다.
승소라는 결과의 짜릿함은 순간이지만 그 결과에서 이어진 의뢰인들의 평온한 일상과의 만남은 한 순간의 한 점이 아니라 나와 오래도록 함께 가는 기다란 선과 같았다.
다음 생의 나에게 행복을 약속해줄 선업이 나도 모르게 쌓여가고 있었다.
#6 초심 무언가 간절히 원할 때 사람은 착해진다.
변호사가 되기 위해 험난한 여정을 겪던 시절, 나 또한 합격만 하면 정의를 세우고 남의 아픔에 공감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말과 글에 갈려 나가는 삶이 그토록 간절했다.
그러니 이 고단함도 내가 원했던 삶의 일부다.
물론 변호사는 참 쉽지 않은 직업이다.
하지만 사람의 바닥을 보았기에 오히려 사람의 존엄함이 얼마나 귀한지를 뼈저리게 깨닫게 되는 역설적인 직업이기도 하다.
나는 오늘도 책상 위에 쌓인 기록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지만, 그 종이 뭉치들 사이에 숨겨진 누군가의 간절한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초심을 떠올린다.
우리 로펌에 입사하는 신참 변호사에게 변호의 업무 스킬을 전하기보다 잘 버티라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변호사라는 직업은 인간에 대한 혐오에 지배되기 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떠날 수 없는 이유를 찾아가는 끝없는 여정임을 깨닫게 되기까지 지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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