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에서의 죽음
토마스 만에게 1929년 노벨상을 안긴 대표작이라면 단연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과 ‘마의 산’이다. 하지만 둘 다 방대한 분량에 비례하는 지루함으로 소문이 자자하다. 그래선지 만의 작품들 중 가장 널리 읽히고 자주 회자되는 것은 140쪽짜리 중편소설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이다. 그리고 종종 ‘작가의 동성애 성향을 고백한 소설’이라는 감상평이 따라붙는다. 한데 과연 어떤 소설가가 자신의 성적 지향을 커밍아웃하기 위해 이런 소설을 쓸까, 그것도 독일에 동성애 금지법 서슬이 퍼렇던 1912년에 말이다.
‘오십을 넘긴 아저씨가 혼자 베네치아로 여행을 갔는데, 그곳 해변에서 놀고 있던 열네 살 미소년에 홀딱 반해 하염없이 쳐다보다가, 전염병에 걸려 죽는 이야기’는 대놓고 부도덕하다. 아셴바흐라는 이름의 이 중년 남자가 소설에서 토로하는 ‘소년애’는 구체적이고, 직접적이며, 심각하게 진지하다. 그는 콜레라가 퍼지고 있는 도시를 탈출할 기회를 스스로 놓아버리고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쾌함”을 느낀다. 숭배의 대상이 거기 있으므로, 악취와 질병까지도 그에게는 피하기 싫은 모험이 된다.
아셴바흐는 ‘무수한 모순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완벽한 모순’ 같은 존재다. 그는 수십 년간 냉철한 이성으로 모범적인 글을 써온 국민 작가이고, 엄격한 규율의 실천을 통해 도덕적 영웅으로 떠받들어져 왔다. 그의 대표작 ‘비참한 사내’는 어느 건달의 윤리적 태만을 준엄하게 꾸짖으며 “타락의 구렁텅이와 결별을 선언”한 소설이다. 따라서 아셴바흐의 ‘베네치아에서의 배덕’은 이제껏 그를 추앙했던 무고한 시민들에 대한 모독이자, 존경스러운 문학에 대한 우롱이다. 게다가 그의 존재 증명은 언어로써만 가능한데, 정작 사랑하는 소년은 그가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는 폴란드어를 쓴다.
어쩌면 만은 이 작품을 통해 ‘시민정신’의 기치를 앞세워 도덕적 엄숙주의와 청결함에 집착하는 근대인이 점점 더 은밀하게 감추게 된 인간 내면의 야수성을 탐색하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갖가지 신화와 상징이 빈틈없이 들어차 있으면서 절묘하게 어우러진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이 수치와 쾌락, 즉 길티플레저의 중독적 매력에 관한 아름답고 비극적인 우화인 것은 확실하다.
[이수은, 독서가· ‘느낌과 알아차림’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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