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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07 (토)

    엡스타인 생존자의 마지막 선물 “내 고통이 다른 여성에겐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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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생트로페의 요트에서 열린 2001년 5월 나오미 캠벨의 서른 한 번째 생일파티 사진. 맨 앞쪽 오른쪽 금발머리 여성이 17세 때의 버지니아 주프레. 주프레 오른쪽에 보이는 하늘색 상의를 입은 여성이 길레인 맥스웰이다. 캠벨 왼쪽의 남성은 캠벨의 전 연인인 사업가 플라비오 브리아토레.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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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바디스 걸

    버지니아 로버츠 주프레 지음|김나연 옮김|노바디스 걸|은행나무|656쪽|2만7000원

    2000년 여름, 도널드 트럼프가 운영하는 미국 플로리다주 팜비치의 마러라고 클럽. 스파 라커룸에서 수건 나눠주는 일을 하던 16세 소녀에게 명품으로 치장한 30대 후반 여성 길레인 맥스웰이 접근한다. 마사지 치료사가 되고 싶다는 소녀에게 “너를 고용해 줄 부유한 남자를 소개해주겠다”고 제안한다. 소녀는 그날 그 ‘부유한 남자’의 저택을 방문했고 당시 마흔일곱 살이던 제프리 엡스타인에게 성폭행당한다. 그리고 25개월간 엡스타인과 연인 맥스웰에게 종속돼 성학대당하고, 영국 앤드루 왕자 등 상류층 인사들에게 성접대 뇌물로 바쳐진다.

    지난해 10월 영국서 출간돼 큰 파문을 불러일으킨 버지니아 로버츠 주프레(1983~2025)의 이 회고록은 정에 굶주린 10대 소녀가 애정과 관심을 미끼로 다가온 나쁜 어른들의 먹잇감이 되어 고통받다가 간신히 살아남아 학대자들을 응징하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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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엡스타인 사건 생존자인 버지니아 주프레의 회고록 '노바디스 걸'./은행나무


    주프레는 여덟 살 때부터 아버지와 아버지 친구에게 성폭력을 당하지만 어머니에게 외면당한다. 방황하던 주프레는 마약에 빠졌고, 어머니가 보낸 재활센터에 감금당해 있다가 탈출한다. 갈 곳 없는 열다섯 살 소녀를 기다리고 있던 건 중년 남성들의 성착취였다. 엡스타인을 만났을 때 주프레는 이미 만신창이였고, 엡스타인은 먹잇감의 가장 약한 고리를 치밀하게 파고들어 조종했다. “지난 10년 동안 내 주변의 남자들은 학대라는 본질을 ‘사랑’이라는 가짜 껍데기로 교묘히 포장했다. 엡스타인과 맥스웰은 바로 이 뒤틀린 혈관을 바늘로 어떻게 헤집어야 하는지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영국 미디어 재벌의 딸로 아버지 사망 후 곤궁해진 맥스웰은 엡스타인에게 권력자들을 연결시켜 소개해 주고 소녀들을 제공하는 대가로 화려한 생활을 영위했다. 주프레는 17세 때인 2001년 3월 런던에서 앤드루 왕자를 처음 만났고, “제프리에게 하던 걸 앤드루에게도 해”라는 맥스웰의 지시를 따른다. 다음은 뉴욕에서, 그다음은 카리브해 섬에서 벌어진 난교 파티에서 유린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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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프레(사진 가운데)가 17세 때 앤드루 왕자(왼쪽), 맥스웰(오른쪽)과 함께 런던에서 찍은 사진./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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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프레는 19세 때 태국 치앙마이의 마사지 학교에 교육받으러 가게 된 걸 계기로 엡스타인과의 관계를 끝내야겠다 결심했고, 치앙마이에서 알게 된 이탈리아계 호주인 남성과 만난 지 열흘 만에 결혼하면서 마침내 탈출한다.

    주프레가 호주에서 두 아들을 낳고 결혼 생활을 하던 사이 미국에선 한 피해자 부모의 신고로 엡스타인의 범죄가 서서히 베일을 벗는다. 주프레는 2008년 미국 법무부로부터 연방 범죄의 피해자로 확인됐다는 연락을 받았지만, 엡스타인은 이미 정부와 비밀리에 불기소 합의를 맺어 고작 징역 18개월의 유죄 인정 형량 거래를 끝낸 상태였다. 법무부가 직접 변호사를 연결해 주어 민사소송을 제기한 결과 합의금 50만달러를 받았지만 대중은 돈을 받았다는 이유로 주프레를 ‘꽃뱀’ 취급했다. 주프레는 말한다. “소장에 적힌 고통과 고난, 정신적 고뇌라는 법률 용어는 결코 추상적인 수사가 아니다. 상처 입은 삶은 실재하며, 이를 치유하는 데는 막대한 비용이 든다.”

    가명으로 소송을 제기했던 주프레는 2010년 딸 엘리를 낳은 후 얼굴을 드러내고 싸운다. 딸이 살게 될 세상을 바꾸고 싶어서다. 그 이후 벌어진 일들은 익히 알려진 대로다. 2011년 2월 앤드루 왕자와 함께 찍은 사진이 영국 데일리 메일에 공개됐다. 2019년 엡스타인이 성매매·인신매매 등 혐의로 체포됐고, 그해 8월 교도소에서 극단적 선택을 한다. 2021년 11월 29일 맥스웰이 유죄판결을 받는다. 2022년 2월 15일 주프레는 앤드루 왕자를 상대로 진행한 민사소송에서 합의한다. 왕자는 2025년 10월 결국 작위를 박탈당한다. 그간 미국 여러 주에서 아동성범죄 피해자들을 위한 법률 개정이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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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월 10일 미국 워싱턴 D.C.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제프리 엡스타인 사건의 피해자 중 한 명인 샬린 로샤르가 버지니아 주프레의 사진을 들고 있다./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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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여자체조 국가대표팀 주치의가 수십 년간 수백 명의 선수를 상습적으로 성폭행·성추행한 ‘래리 나사르 사건’의 피해자 중 한 명인 카일 스티븐스는 말했다. “어린 소녀는 영원히 어리지 않다. 그들은 강인한 여자가 되어서 돌아와 당신의 세계를 파괴할 것이다.”

    주프레의 회고록은 스티븐스의 말을 상기시키지만, 책 너머의 이야기는 해피엔딩과는 거리가 멀다. 책에서 구원자로 묘사된 남편은 사실 주프레에게 꾸준히 폭력을 가해 왔다. 주프레는 2025년 4월 5일 미국 잡지 ‘피플’에 발표한 성명에서 “나는 길레인 맥스웰과 제프리 엡스타인에게 맞서 싸울 수 있었습니다. (…) 하지만 결혼 생활을 지속하며 겪은 가정폭력은 최근에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라고 밝힌다. 그리고 그달 25일 스스로 삶을 버린다.

    이 책은 평생 학대에 시달린 한 여성이,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다른 여성들을 위해 남긴 마지막 선물이다. 주프레와 함께 이 책을 쓴 작가 에이미 월러스는 주프레가 세상을 떠나기 전 보낸 메일을 소개하며 말한다. “하지만 그녀는 책이 반드시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자신의 고통이 무언가를 이루는 데 쓰이길 바랐고, 자신의 경험이 학대를 겪은 어느 한 사람에게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 모든 노력이 가치 있다고 했다.” 내일(3월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다.

    [곽아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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