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안보다 실효성 없는 입법 차단에 충실
고위 조직 ‘군살’ 빼기 등 행정철학 빛나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유난히 많은 국무총리와 장관의 묘비였다. 익숙한 이름도 있었지만, 낯선 이들이 더 많았다. 바닷가 모래알처럼 수많은 역사 속 인물 가운데, 직함이 아니라 공적(功績)으로 오늘의 우리에게 기억되는 이는 과연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곳에 잠들어야 할 사람 역시 ‘국립묘지법’의 기준처럼, 직위가 아니라 ‘국가 또는 사회에 현저하게 공헌한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
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원 원장 |
그런데 정치인이나 고위 관료가 아닌 이들의 묘비는 사뭇 달랐다. ‘체육인’ 손기정, ‘1가구 1전화’ 시대를 연 최순달, 국가표준 제도의 기반을 세운 김재관의 묘비에는 자리가 아니라 공헌이 새겨져 있었다. 한 사람의 삶을 말해 주는 것은 직위가 아니라 시대에 남긴 흔적이라는 사실이 실감 나게 다가왔다.
가장 오래 발걸음을 붙잡은 것은 짧은 묘비명이었다. “신문이 창문 없는 집 같았다. 그래서 만화라는 창문을 내고 싶었다”(시사만화가 김성환), “에너지 자립 없는 나라에 진정한 자주독립은 없다”(원자력 기술자 한필순), “배우고 나누어 이웃의 길잡이가 되라”(생명과학자 박상대) 같은 문장들이었다. 특히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들판을…”이라는 윤석중의 묘비 앞에서는 내 어린 시절의 운동회 장면이 떠올랐다. 어두운 시대에 아이들의 마음에 빛을 심으려 했던 그의 공헌 앞에서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문득 세종 때 국가와 사회에 뚜렷한 공헌을 남긴 인물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북방 영토경영의 김종서, 한·일 외교를 정상화한 이예, 과학기술 분야의 장영실이 먼저 생각났다. 그러면 세종의 ‘국무총리’라 할 영의정 황희의 공적은 무엇일까 하는 물음도 이어졌다. 그는 한눈에 드러나는 업적을 남긴 인물은 아니었다. 북방 개척이나 공법 시행에서도 신중한 태도를 보였고, 때로는 반대 의견을 내기도 했다. 겉으로 보면 개혁을 주저한 인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는 조선을 대표하는 정승으로 자리매김했다. 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황희는 요컨대 ‘무위(無爲)의 리더’였다. 그는 새로운 일을 제안하기보다는, 실효성 없는 입법을 차단하는 역할에 더 충실했다. 1432년, 도성 안 집집마다 두세 개의 문을 설치하자는 법령이 어전회의에 올라왔다. 화재 같은 재난에 대비해 대피로를 마련하자는 취지였고, 대부분은 이를 찬성했다. 그러나 황희는 반대했다. 문을 낼 자리조차 없는 집이 많은 현실에서 법을 강행하면 “번거롭고 요란하기만 하고 이루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취지가 좋아도 현실에 맞지 않으면 오히려 민폐가 된다는 판단이었다.
황희는 1423년에 자신이 속한 재추(宰樞), 즉 정2품 이상의 재상 자리에 정원인 40명보다 많은 70명이나 충원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초과된 30명을 정리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비대해진 고위 관료 조직의 군살을 빼고, 실효성 없는 일들을 제거해 주어야, 인재들이 정말로 중요한 일에 전념할 수 있다는 게 황희의 행정철학이었다. 우리 사회의 불필요한 일을 줄이고 조직의 무게를 덜어 낼 ‘대한민국의 황희’가 지금 절실히 그립다.
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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