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산의 관문, 대만 자이를 가다上
제국의 탐욕이 깔아놓은 궤도 위로
이제는 ‘히노키 향’이 상처를 덮는다
시장통 왁자지껄함 속에 피어오른 김
3대(代)째 이어온 어탕 한 그릇의 위로
해발 1000m 차밭에서 마주한 아리산
안개와 햇살이 싸워 이긴 향기
베어지고도 살아남은 ‘천년의 뿌리’. 히노키 빌리지 한편에 전시된 거대한 붉은 녹나무(Camphor Tree) 그루터기. 수령 천 년이 넘는 이 신목(神木)의 잔해는 아리산 벌목의 역사를 묵묵히 증언하는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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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산의 아름드리나무를 실어 나르던 열차들이 이제는 차고원구에 멈춰 서 있다. 붉게 녹슨 차체 옆으로 무심하게 자라난 거대한 고목이 지나간 세월의 무상함을 보여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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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천년목 수탈 상처 사무친 철길
자이를 이해하는 첫 번째 키워드는 철도다. 자이역 인근 ‘아리산 삼림철도 차고원구’에 들어서면 시간이 멈춰 선 기관차와 객차들이 여행자를 맞는다. 붉은 녹이 번진 선로는 본래 낭만을 위해 깔린 길이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아리산 원시림의 삼나무와 편백을 베어 나르기 위해 이 가파른 산악철도를 건설했다. 자이는 그 목재가 모이고 흩어지던 전초기지였다. 철길은 산업의 동맥이었으나 동시에 숲의 눈물이 흘러내리던 상처의 통로였다.
이곳의 풍경이 아름다우면서도 서늘한 이유는 그 때문이다. 육중한 증기기관차 ‘셰이’(Shay) 앞에 서면 낭만과 과거사가 동시에 교차한다.
일본식 정원의 정갈함을 간직한 히노키 빌리지 내의 연못. 수면 위로 비친 나무와 하늘의 반영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 벌목의 전초기지였던 땅은 이제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는 치유의 공간으로 거듭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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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창한 가로수와 검은 목조 건물이 어우러진 히노키 빌리지의 거리.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번잡한 도시의 속도와는 다른, 이곳만의 여유로운 시간이 느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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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실에 묶어둔 수만 가지 바람들. 수많은 사람의 소원이 적힌 나무 패가 붉은 끈에 매달려 빼곡하게 걸려 있다. 가족의 건강, 사랑의 결실, 합격의 꿈…. 저마다의 간절한 바람들이 히노키 빌리지의 한 켠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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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시간을 재생공간으로…히노키 빌리지
자이는 이 불편한 시간을 예쁘게 포장하지 않는다. 낡은 관사를 허무는 대신 보수하고 다듬어 ‘히노키 빌리지’라는 재생의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낮은 처마 아래 난 마루를 밟으면 100년 전 목재의 마른 숨결이 발바닥으로 전해진다. “과거를 지우는 것은 쉽지만 남겨두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는 현지 가이드의 말이 낡은 기둥 사이에 머문다. 상처를 미화하지 않고 그 위에 현재를 조심스럽게 포개어 놓은 정직한 태도, 그것이 이 도시가 과거와 화해하는 방식이다.
도시의 기억이 무거울수록 사람의 온기는 더 절실해진다. 자이의 골목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그 온기는 음식에서 먼저 피어난다. 3대째 60년 넘게 자리를 지킨 ‘린총밍(林聰明) 어탕’ 앞에는 늘 사람의 기척이 짙다. 커다란 솥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김이 공기 중에 퍼지고, 1인분에 약 300~400 대만달러(한화 약 1만~1만 7000원) 남짓한 어탕을 기다리는 이들의 수다가 도시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자이 구 교도소 인근에 위치한 옛 직원 숙사군.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목조 가옥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이곳은 이제 문화 창의 구역으로 탈바꿈하여 여행자들에게 고즈넉한 시간 여행을 선사한다. 낡은 벽면과 기와지붕 사이로 흐르는 정적은 자이가 품은 근대사의 깊이를 묵묵히 전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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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자이를 대표하는 노포 맛집 린총밍(林聰明)의 활기 넘치는 주방 전경. 커다란 솥에서 튀겨낸 생선 머리와 비법 육수가 어우러진 냄비어탕(砂鍋魚頭)은 자이 사람들의 고단함을 달래주던 생활의 맛이자 여행자의 발길을 붙드는 미식의 정수다. 왁자지껄한 시장통의 분위기 속에 끓어오르는 뜨거운 국물 한 그릇이 도시의 따스한 온기를 건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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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솥에서 튀겨낸 생선 머리와 비법 육수가 어우러진 대만 자이의 냄비어탕(砂鍋魚頭)은 자이 사람들의 고단함을 달래주던 생활의 맛이자 여행자의 발길을 붙드는 미식의 정수다. 왁자지껄한 시장통의 분위기 속에 끓어오르는 뜨거운 국물 한 그릇이 도시의 따스한 온기를 건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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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긴 ‘차오위’(초어·草魚) 머리와 배추, 두부를 넣고 ‘사차장’(沙茶醬)으로 칼칼하게 끓여낸 국물은 화려한 미식의 언어보다 투박한 생활의 언어에 가깝다. 한 숟갈 떠 넣으면 묵직한 감칠맛이 혀를 두드린다. 이는 고단한 삶의 틈새를 메워주었을 법한 단단한 맛이다. 낯선 여행자도 그 국물 한 그릇 앞에서는 금세 손님이 아니라 동네 사람처럼 숟가락을 들게 된다. 자이는 거창한 환대 대신 땀방울이 밴 뜨거운 국물 한 그릇으로 타지인의 경계를 허문다.
차밭 앞 다실에 앉는 순간 이 산의 본심이 비로소 열렸다. 주인장은 뜨거운 물로 찻잔을 데우고 둥글게 말린 찻잎을 다관에 넣었다. “아리산의 차는 안개와 햇살이 싸워 이긴 흔적”이라고 말하는 그의 손길은 느리지만 정확했다. 이윽고 찻잎이 풀리며 향이 피어올랐다. 처음에는 꽃향기처럼 화사했고, 이어 부드러운 단맛이 번졌으며 마지막에는 은은하게 혀끝을 누르는 쌉쌀함 뒤로 ‘회감(回甘, 차를 마신 후 목에서 올라오는 단맛)’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해발 1250m, 구름이 폭포처럼 흐르는 ‘운폭(雲瀑)’으로 유명한 시딩 마을은 아리산 고산차의 핵심 산지다. 다관에서 찻잎이 서서히 풀리며 내뿜는 향기는 안개 자욱한 산의 본심을 그대로 전한다. 정성스레 차를 우려내고 음미하는 과정은 단순한 체험을 넘어, 대자연의 정기를 몸 안으로 받아들이는 고요한 의례가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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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록 문창원구 내 공연장에서 펼쳐지는 조족(주족)의 전통 노래와 춤. 이 역동적인 몸짓은 단순한 공연을 넘어 조족의 역사와 신화, 그리고 자연을 존중하는 그들의 독특한 생명관을 계승하는 의식이다. 관람객들은 이 리듬 속에서 아리산 원주민의 강인한 생명력을 체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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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산 중턱 시딩 마을을 하늘에서 바라본 모습. 층층이 일궈진 차밭이 산의 능선을 따라 정교한 등고선을 그리며 예술적인 기하학 문양을 완성한다. 운폭(雲瀑)이 지나는 길목에 자리한 이 마을은 하늘에서 조망할 때 비로소 그 거대한 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노력이 빚어낸 조화를 한눈에 드러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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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산 올라 시간의 정수 茶를 마신다
아리산 우롱차가 특별한 이유는 높은 해발고도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찻잎은 혹독한 일교차와 짙은 안개를 견디며 제 성장을 늦추는 대신 향을 농축시킨다. 이번 여행에서 아리산은 봉우리보다 찻잔으로 먼저 기억됐다. 이 산은 보는 풍경인 동시에 마시는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차를 마시다 보면 자꾸 말이 줄어든다. 안개가 차밭을 훑고 지나가는 속도를 보고 있노라면, 세상의 속도에 길들여진 마음에도 잠시 쉼표가 찍힌다.
이번 여정에서 끝내 삼림열차를 타지는 못했다. 그러나 아쉬움보다는 오히려 더 또렷한 감각이 남았다. 기차를 타고 오르지 않았기에 철도의 역사적 무게를 더 차분히 응시할 수 있었고, 정상의 비경을 좇지 않았기에 중산간의 차향과 여백이 더 깊게 스며들었다. 여행이 늘 정답 같은 동선으로만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조금 비껴선 길이 한 장소의 본질을 더 정확히 보여준다.
아리산 중턱 시딩 마을을 하늘에서 바라본 모습. 층층이 일궈진 차밭이 산의 능선을 따라 정교한 등고선을 그리며 예술적인 기하학 문양을 완성한다. 운폭(雲瀑)이 지나는 길목에 자리한 이 마을은 하늘에서 조망할 때 비로소 그 거대한 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노력이 빚어낸 조화를 한눈에 드러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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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수첩
▶가는 법=대만 고속철도(THSR)를 이용해 자이역까지 이동. 타이베이역에서 약 1시간 30분, 가오슝에서 30분 내외면 닿는다. 도심 내 이동은 택시가 편리하다.
▶주의사항=아리산 중산간은 평지보다 기온이 5~10도 낮다. 갑작스러운 우천이나 안개에 대비해 가벼운 바람막이와 접이식 우산을 지참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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