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남북관계를 '교전 중인 적대적 두 국가'로 규정했다. 그리고 올해 2월, 조선노동당 제9차 대회에서 그것을 공식 선언으로 못 박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가장 적대적인 실체인 대한민국과 상관할 일이 전혀 없으며 한국을 동족이라는 범주에서 영원히 배제할 것입니다."
당 대회를 통한 공식 선언이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김정은은 3월 26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도 재확인했다.
"한국을 가장 적대적인 국가로 공인하고 가장 명백한 언사와 행동으로 철저히 배척하고 무시하면서 다루어나가며 우리 공화국을 건드리는 한국의 행위에 대해서는 추호의 고려나 사소한 주춤도 없이 무자비하게 그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
이제 질문은 하나로 좁혀진다. 우리는 이런 북한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뉴스타파는 이 질문을 들고 두 사람을 찾아갔다. 서로 다른 두 가지 길을 제시하는 두 명의 원로다.
한 사람은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다. 그는 하나의 국가로 합치는 통일이 아니라 두 국가로 공존하는 남북연합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남과 북은 동족이며, 교류와 만남을 통한 평화적 공존이 가능하고 또 필요하다고 본다.
다른 한 사람은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이다. 그는 현재 상태로는 남과 북이 평화적 공존을 하기 어렵다며, 우선 담장을 분명히 쌓고 동족이 아닌 이웃으로 살아가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말한다.
두 사람은 모두 진보 정부의 장관을 역임했다. 정세현은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통일부 장관이었고, 송민순은 노무현 정부의 국가안보실장, 외교통상부 장관을 역임했다. 그러나 다른 해법을 내놓았다.
'그래도 동족이다'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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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김정은은 왜 돌아섰나
2018년, 남북은 뜨겁게 만났다. 판문점에서 두 정상이 손을 잡았고, 마침내 평양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15만 평양시민 앞에서 연설했다. 그것은 놀라운 파격이었다."능라도 경기장에서 15만 평양시민을 모아놓고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문을 사전검열 없이 연설을 하게 허용을 했어요. 대단한 신뢰를 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렇게까지 해줬건만, 약속을 하나도 지키지 않았어요. 못 했어요."
'안 지킨 것'이 아니라 '못 지킨 것'이다. 그 이유는 한미워킹그룹에 있었다.
2018년 급격히 가까워진 남북관계에 당황한 미국이 남북 교류·협력 사안을 사전에 조율하는 협의체를 제안했고, 문재인 정부는 이를 수용했다.
"그 문재인 정부 외교 안보 당국자들이 그걸 덜컥 받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그때 정부 밖에 있었기 때문에, 망했다. 이제 한 발짝도 못 나간다."
결과는 그의 생각대로였다. 개성공단도, 금강산 관광도 성사되지 못했고, 심지어 독감 치료제 타미플루조차 북한에 보내지 못했다. 비무장지대를 관리하는 유엔사가 '약을 실은 트럭'이 대북제재 품목이라며 막아선 것이다. 주한미군 사령관이 유엔사령관이기도 하기 때문에 사실상 미국이 막은 것이었다.
"아니 트럭은 주는 거 아니잖아요. 개성에다 내려놓고 돌아온다는 얘기를 해도, 안 돼. 그럼 우리가 각서를 쓰고라도 트럭은 돌아올 테니까 가도록 해달라 해도 역시 그야말로 벽창호같이 안 된다. 타미플루 약을 못 보냈어요."
정세현 전 장관은 문재인 정부가 더 강하게 밀어 붙였어야 했다고 말했다. 손수레로라도 판문점까지 타미플루를 싣고 갔어야 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처음엔 안 된다고 해도 계속 졸라대면 결국 승인을 한다는 것이 그의 경험이다. 그는 문재인 정부의 보좌진들이 주저앉은 게 잘못이었다고 비판했다. 이재명 정부의 정동영 통일부 장관도 업무보고에서 비슷한 생각을 밝혔다. "개성공단과 금강산 재개 요청에 호응하지 못한 것은 대단한 실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국정최고 책임자였던 문재인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한스럽다'고 표현했다. 그는 "북미정상회담이 잘되면 제재가 부분적으로 해제되고 개성공단, 금강산관광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대북협력을 하는 과정에서 미국과 지나친 갈등을 하면 북미 대화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조심스러운 입장이었다. 실제로 문재인 정부의 중재 역할이 북미 대화의 진전에 큰 동력이 됐다. 그러나 결국 하노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합의를 거부한 뒤 북한은 북미 대화나 남북 대화에 대한 입장을 수정했다.
이 논란은 이재명 정부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2025년 12월, 외교부가 한미 대북정책 고위급 협의를 추진하자 통일부가 불참을 선언하며 맞섰다. 정세현 전 장관을 포함한 전직 통일부 장관들은 "한미 간 대북정책 공조가 워킹그룹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성명을 냈다.
정세현 전 장관은 문재인 정부 당시 남측이 미국을 거스르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북한이 남북 간 협력의 한계를 인식했다고 했다
"북한 용어로 남조선 아 새끼들이, 미국이 못한다 하면 아무것도 못하는구나, 이렇게 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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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조선인민혁명군 창건 90돌 열병식/2022.4.27.
김정은은 무엇을 두려워하나
김정은이 남한에 등을 돌린 것이 단순히 약속을 못 지킨 한국 정부에 대한 실망 때문만은 아니라고 정세현 전 장관은 봤다. 더 깊은 곳에는 '두려움'이 있다는 것이다."김정은이 집권해가지고 가만 보니까, 아버지가 문을 잘못 열어가지고 북한 젊은 동무들이 전부 다 남조선으로 정신을 뺐겨 버렸다 이거야. 이렇게 되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혁명전통이나 백두혈통이나 이런 것이 거부당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나까지도 위험하게 날아간다."
USB 하나로 한국 드라마가 들어오고, 남한 노래가 퍼지고, 젊은 세대의 정신이 남쪽으로 향하는 것. 그것이 핵보다 더 두려운 위협이었다. 그 두려움이 반동사상문화배격법으로, 그리고 적대적 두국가론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남쪽의 드라마나 음악을 USB로 가지고 들어오면 사형이고, 그걸 본 것이 들통 나면 7년 이상 무기징역까지도 살릴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걸 보고, 아, 이 사람들이 심하게 지금 남한에 대해서 공포를, 대남공포증을 가지고 있구나."
핵을 가진 나라가 한국 드라마를 두려워한다. 그 역설이 김정은 체제의 실상이다. 그러나 정세현 전 장관은 적대적 2국가론이 오래 가지는 못할 것이라고 봤다.
"내가 지금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는 김주애가 후계자가 되는 걸 꿈도 못 꾸는 시대가 올 수 있다면, 차라리 남한 문화가 들어올 수 없도록 걸어 잠궈야 되겠다. 쇄국정책을 해야 되겠다. 그런 생각으로 지금 적대적 2국가론을 펴고 있는데 그게 오래 가지는 못하리라고 봐요."
북한과 어떻게 만날 것인가
정세현 전 장관이 보기에 지금 이재명 정부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김정은과 만나 협상하는 피스메이커 역할을 하고 우리는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하는 전략은 방향이 맞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미 북한을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인정한 만큼, 비핵화 구호를 내려놓고 현실적인 협상이 가능하다는 것이다.그가 제시하는 현실적 경로는 단계적이다. 트럼프와 김정은이 만나 먼저 핵 동결을 합의하고, 그 다음 남북한 주변 국가들을 포함한 틀에서 한반도 평화체제를 만들면서, 단계적 감축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핵 동결부터 시작하자. 더 이상 만들지 마라. 그 다음에 감축 문제는 6자가 다시 만나서 감축을 얘기하면서 정전체제 평화체제의 전환 문제도 같이 거기서 묶어서 얘기를 해야 됩니다."
다만 그는 비핵화의 어려움을 솔직하게 인정했다. "지금까지 핵을 개발한 나라가 비핵화를 한 적은 없습니다. 북한이 핵을 축소는 할 수 있지만 비핵화까지는 꿈을 꿀 수 없다는 얘기예요." 결국 핵을 쓰지 못하도록 만드는 구조, 즉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현실적인 목표라는 것이다.
남북연합이 답이다
정세현 전 장관이 이 인터뷰에서 가장 강조한 것은 남북연합이다.그는 통일이라는 목표를 현실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북한의 1인당 소득은 1200달러, 남한의 30분의 1 수준이다. 이 격차를 무시하고 통일을 서두르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가 제안하는 모델은 유럽연합이다. 국호도, 군대도, 화폐도 따로 쓰되 경제적으로 협력하는 공존의 틀을 만들자는 것이다. 영문으로는 '코리안 유니언' 또는 북한이 부담스럽다면 '코리안 컨페더레이션'이라고 불러도 좋다고 했다.
"적어도 우리가 이 지역에 같이 살고 있는 한, 정체 따로, 국가 이름 따로, 하지만 연합은 만들어가지고 서로 돕자, 싸우지 말자."
이 제안에는 북한을 향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김정은이 두국가론을 들고 나온 배경에는 흡수통일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남북연합이라는 틀을 분명히 제시함으로써 북한에게 그 두려움을 내려놓을 여지를 주자는 것이다.
"북한을 일단 적대적 두국가에서 공존적·협력적·평화적 두국가 상태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는 로드맵의 마지막 단계로서 남북연합을 정부가 공식적으로 표방하면서 북한과 관계 개선을 시도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너그러움과 인내다. 독일 통일 전, 서독의 보수 정당들이 동독을 향해 조건 없이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처럼. 그것이 결국 통일의 밑거름이 됐다.
"남북연합이라는 그 틀 속에서 우리가 마음 놓고 북한의 대남 군사적인 도발이라든가 이런 걱정 없이 계속 증권 시장에 빨간 불이 켜질 수 있도록 만들려면, 동방정책 시기에 서독의 보수 정당들이 했던 그런 너그러운 태도, 그건 좀 배울 필요가 있어요."
그래도 만나야 한다. 김정은이 남한을 영원한 적이라고 선언했어도. 그것이 정세현의 답이다.
2편 예고
같은 진보 정부에서 함께 일했던 또 다른 전직 장관의 답은 다르다.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 그는 1987년부터 북핵 협상을 담당해온 외교관 출신이다. 2005년 6자회담에서 9.19 공동성명을 이끌어냈다. 북한이 핵을 완성하는 과정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봤다. 그리고 그의 생각이 바뀌었다.
핵을 가진 나라는 핵을 포기하지 않는다. 만남이 오히려 북한의 위상만 높여줄 수 있다. 비핵화를 고집하는 것이 오히려 우리 스스로를 묶는 자승자박이 된다. 핵잠재력을 확보하는 등 담장부터 튼튼히 해야 한다.
「담장을 쌓고 이웃으로 살자」— 2편에서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의 이야기를 듣는다. 4월 10일 방송 예정.
뉴스타파 뉴스타파 다큐팀 docu@newstap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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