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6.26 (수)

[ESC] 꼿꼿하고 의로운 ‘조선 선비’ 어디 없소?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ESC] 이기적인 여행

영남대로 넘어 ‘선비’ 찾아 대구·경북 한바퀴

백불고택·임청각 등 고택마다 고고한 선비 체취

진남교반 바윗길엔 선비·상인 발자취 또렷

선비촌·무섬마을 전통문화 체험 해볼만



한겨레

대구 옻골마을 느티나무숲. 이병학 선임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선비’는 일반적으로 조선시대의 지식인을 가리킨다. 학식과 인품을 갖추고 의로운 일을 행하며 서민대중을 이끄는 인물상이다. 문(文)·사(史)·철(哲)을 두루 꿰는 학자요, 시(詩)·서(書)·화(畵)에 능한 예술인이었다. 유교 이념을 기본으로 자신에게 엄격한 언행,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기개와 지조, 백성의 모범이 되는 처신이 선비들 삶의 바탕을 이룬다. 저물어가는 한 해의 마지막 여행지로, 올곧은 삶을 살았던 옛 선비들의 체취가 밴 곳들을 골라보면 어떨까.

한겨레

선비들의 꼿꼿한 정신과 의로운 삶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선비들도 상인들도 오고 가던 옛 영남대로 일대에도 선비들 이야기가 가득하다. 대구~안동~영주~문경을 거치며 옛 선비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봤다.

먼저, 오래된 한옥들과 정갈한 느티나무숲이 아름다운 대구시 둔산동 옻골마을을 찾았다. 시냇가에 옻나무가 많이 자생해 옻골(칠계)로 불리는 이곳엔 경주 최씨 ‘칠계파’ 후손들이 사는 고택 20여채가 남아 있다. 임진왜란 때 대구 지역 의병장 최계의 아들 대암 최동집이 1616년 정착해 집성촌을 이룬 곳이다. 눈길 끄는 집이 ‘백불고택’이다. 대암의 5대 손 백불암 최흥원이 살던 집으로,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가옥이라고 한다. 1630년대에 지어진 ‘ㄷ자’ 형 안채와 1700년대 건물인 사당 보본당과 대묘·별묘, 1905년에 중건한 사랑채 등이 모두 고색창연하다.

대구 지역의 대표적 성리학자였던 최흥원은 검소한 삶을 살며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는 데 앞장섰다고 한다. 지역 주민 생활이 어려워지자 향약을 만들고, 곡식창고인 ‘선공고’(세금을 내는 창고)와 ‘휼빈고’(백성을 구휼하는 창고)를 세워 서민들 생활을 안정시켰다. 남영선 옻골마을 해설사는 “백불암 선생은 하인을 쓸 때도 아픈 데는 없는지, 끼니를 거르지는 않았는지 살펴본 뒤 일을 시켰다”며 “후손들도 그런 삶을 살아 서민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말했다.

한겨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사당인 보본당은 영조의 명으로 교정청이 설치됐던 곳이다. 최흥원이 어명을 받아 보본당 서쪽 방에서, 반계 유형원의 저서 <반계수록>의 교정본을 완성했다고 한다.

이 마을 경관을 한층 돋워주는 것이 수백년간 마을을 지켜온 아름드리 고목들이다. ‘최동집 나무’로 불리는 350여년 된 회화나무 두 그루가 아름답다. 마을 들머리엔 300~400년 된 느티나무들로 이뤄진 비보림(액을 막기 위해 조성한 숲)이 자리 잡고 있다. 잎 다 떨군 느티나무 고목들은 한겨울에도 운치를 자아낸다. 옻골마을 고택들에서는 한옥 숙박체험도 할 수 있다.

대구 도심의 국채보상운동기념관과 기념공원에도 들러볼 만하다. 1907년 일제의 강요에 의해 급증했던 나랏빚을 ‘온 국민의 힘으로 갚자’며 들불처럼 번져갔던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된 곳이다. 나라가 어려울 때 앞장서 해결책을 제시하고 실천한 분들의 행동에도 선비 정신이 깃들어 있다.

여유가 있다면, 명소로 자리 잡은 ‘김광석 다시 그리기길’을 거닐거나 앞산(658m)에 올라 대구시내 전경을 감상해 보는 것도 좋겠다. 앞산 전망대로 오르는 케이블카를 타러 가는 길에 항일독립운동에 몸 바친 선비들, 임용상·이시영 선생 등의 기념비를 만날 수 있다.

한겨레

안동 임청각. 군자정 이병학 선임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안동은 유교의 본고장으로 불린다. 안동 여행길에 조선 선비 정신의 뿌리를 이룬 유교 이념과 그 유산들을 비켜갈 수 없다. 낙동강 물길 따라 하회마을, 병산서원, 도산서원, 오천 군자마을 등 유명 관광지와 고택들이 즐비하다.

그중에 조선 선비 정신의 큰 줄기를 뚜렷이 보여주는 고택 ‘임청각’(보물 제182호)도 있다. ‘항일독립운동의 성지’로 일컬어지는 아름다운 한옥이다. 일제강점기 동안 이 집에서 무려 9명의 독립운동가가 나왔다. 그 중심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이 있다. 그의 형제, 아들, 사위, 조카, 손자, 그리고 당숙까지 재산을 다 털어 만주로 이주해 독립운동에 나선 집안이다. 선생은 만주로 떠나면서 “나라를 되찾지 못하면 가문도 없다”며 조상의 신주를 땅에 파묻었고, 만주 땅에서 순국 직전 “독립이 되기 전에는 나의 시신을 고국에 가져가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임청각은 본디 99칸에 이르는 대규모 한옥이었으나, 일제가 마당 앞으로 철길을 내며 많은 건물이 철거돼 현재는 60여칸이 남아 있다. 마당에 우물이 있는 안채와 별당형 정자인 군자정이 흥미롭다. 안채의 방은 ‘우물방’으로 불리는데 9명의 독립운동가가 모두 이 방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군자정은 수많은 묵객들과 독립운동가들이 머물다 간 정자다.

한겨레

안동 월영교. 이병학 선임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임청각 옆에 국보인 법흥사지 칠층전탑과 고성 이씨 탑동파 종택도 있다. 가까운 곳에 있는 월영교는 안동댐 밑 낙동강 물길에 놓인 보행교다. 밤에도 다리에 불을 밝혀 연인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이다.

안동에서 30분 거리의 영주는 ‘선비의 고장’으로 불린다. 대표적인 ‘선비 테마 여행지’로 꼽히는 곳이 순흥면의 소수서원과 선비촌이다. 소수서원은 조선 명종 때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오면서 ‘소수서원’이란 사액을 받은,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조선 말까지 모두 4300여명의 유생을 길러냈다고 한다. 도산서원이 배출한 유생이 257명뿐이니, 소수서원의 위상을 알 수 있다.

서원 주변에는 수백년 된 멋진 적송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학자수림’으로 불리는데, 추위를 견디며 푸른빛을 잃지 않는 소나무처럼, 어려움을 이겨내고 참선비가 되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서원 옆에 자리한 선비촌은 조선 선비들의 일상생활 한 자락을 체험해볼 수 있는 한옥체험마을이다. 영주 각 지역의 이름난 고택들을 본떠 지은 한옥·초가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전통혼례 시연, 국궁 체험, 숙박 체험, 전통 옷 입어보기 체험, 떡메치기 체험 등이 벌어진다.

한겨레

영주 선비촌. 이병학 선임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영주시 가흥동 서천 물길 옆 언덕에는 ‘삼판서 고택’으로 부르는 한옥이 있다. 조선 개국공신 삼봉 정도전의 생가로도 불린다. 세 판서가 이 집에서 나왔는데, 고려 말 형부상서를 지낸 정운경(정도전의 부친), 조선 초 공조판서 등을 지낸 황유정(정운경의 사위), 세조 때 이조판서를 지낸 김담(황유정의 외손자)이 그들이다. ‘삼판서 고택은 본디 현 위치에서 1㎞ 떨어진 구성공원 아래 있었으나, 1961년 대홍수로 무너졌다. 현 건물은 옛 사진을 참고해 최근 새로 지은 것이다. 해설사가 상주하므로 영주의 선비 이야기를 상세히 들을 수 있다.

영주 문수면 수도리의 무섬마을에도 가보자. 고택 즐비한 마을 풍경과 마을을 휘감아 도는 물길, 전통의 외나무다리가 모두 아름답다. 영남의 선비들은 한양으로 향할 때 영주에서 소백산 죽령을 넘기도 했지만 문경의 새재를 넘어 다니는 이들도 많았다. 문경에도 선비들 이야기가 가득하다.

‘조선팔도 고갯길의 대명사’로 불리는 문경새재는 청운의 꿈을 품고 과거 보러 떠나던 선비들과 상인 등 서민들의 애환이 깃든 고개다. 문경새재도립공원 안내소에서 제3관문인 조령관까지 탐방로가 마련돼 있다. 겨울엔 산길이 미끄러워져 제2관문 조곡관까지(3㎞) 다녀오는 이들이 많다. 이 구간에서 선인들 흔적인 불망비 무리, 조령원터, 교귀정, 산불됴심비 등을 만날 수 있다. 제1관문(주흘관) 지나 드라마촬영세트장까지는 전기차가 운행된다.

한겨레

문경새재 주흘관. 이병학 선임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문경읍과 점촌읍 사이 3번 국도에 있는 고모산성도 올라볼 만하다. 진남휴게소 주차장에 산성 들머리가 있다. 조령천과 영강이 만나는, 오정산 자락 절벽 위에 신라 때 쌓은 석성이다. 새재로 이어진 옛길이 통과하는 길목이다. 산성 서문 쪽에서 내려다보는 물길과 절벽이 ‘진남교반’으로 불리는 경관이다. 일찍이 경북8경 중 제1경으로 꼽혔던 곳인데, 지금은 물길 위로 도로와 다리들이 엇갈리며 지나는 탓에 경치가 좋지는 않다.

한겨레

문경 고모산성. 이병학 선임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물길 하류 쪽으로 성곽을 따라 잠시 가면 절벽 위 바위를 따라 이어진 영남대로 옛길 흔적을 만난다. ‘토끼비리’(토끼가 길을 알려줬다는 비좁은 벼랑길)가 이곳이다. 오랜 세월 행인의 발길에 반질반질하게 닳은 바윗길이 남아 있다. 벼랑길이지만 곳곳에 목재 계단을 설치해 어렵지 않게 옛길을 살펴볼 수 있다.

한겨레

고모산성 들머리엔 옛 철길 터널을 활용해 조성한 ‘오미자 테마 터널’이 있다. 화려한 조명시설과 와인 바, 카페, 트릭아트 존, 오미자 요리 체험관 등을 갖춰 젊은 연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여행의 피로는 문경읍의 문경온천에서 풀 수 있다.

대구 안동 영주 문경/글·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leebh99@hani.co.kr




한겨레

대구 백불고택. 이병학 선임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권역별 테마 여행 코스’는?

지자체가 자기 고장의 여행지만을 홍보하는 관행에서 벗어나, 이웃 지자체와 연계 관광코스를 마련하는 곳들이 늘고 있다. 관광객 유치 경쟁 관계에서 상생의 관계로 나아가면서, 관광 시너지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각 지자체들과 협력해 마련한 ‘권역별 테마여행 10선’도 그런 취지다. 지역 간 협력을 통해 단일 테마로 이은 10개 권역의 여행 코스들이다. 3~4개 시·군을 단일 권역 여행 코스로 묶어, 분산형·체류형 관광지로 키울 계획이다.

대구·안동·영주·문경 ‘선비 이야기 여행’ 코스가 그중 하나다. ‘선비 이야기 여행’ 코스를 기획한 대구경북연구원 송재일 연구실장은 “대구와 경북 북서부 지역은 조선시대 한양으로 통하는 영남대로와 그 지선들이 분포한 곳”이라며 “꼿꼿하고 의로웠던 조선 선비들의 발자취가 무수히 깔려 있어 국내 최고의 ‘선비 문화 탐방 코스’로 키워볼 만하다”고 말했다.

여행자들로서는 이 코스를 여행할 때 ‘선비 문화’에만 주목할 필요는 없다. 지역마다 특별한 경관이 있고, 색다른 먹을거리가 기다리기 때문이다. 예컨대 각 지역의 옛 한옥·서원·사찰의 건축물에 주목하는 ‘고건축 기행’, 대구 서문시장 음식과 안지랑곱창골목, 안동 헛제삿밥·간고등어·찜닭, 영주 풍기 인삼 요리 등을 묶는 ‘식도락 기행’ 등도 해볼 만하다.

이병학 선임기자

여행 문의 대구관광정보센터 (053)627-8986, 안동관광정보센터 (054)856-3013, 영주시청 새마을관광과 (054)639-6601, 문경새재도립공원 (054)550-6414.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신문구독]
[사람과 동물을 잇다 : 애니멀피플] [카카오톡]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