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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나폴리 피자집의 낮은 홍대의 밤보다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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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트래블-10] 얼마 전 '미국 요리 영화와 음식'에 대한 강의가 있어서 추수감사절과 관련된 자료를 찾다가 영화 '터키 Free Birds'를 봤다. 내용은 이렇다. 칠면조인 '레지'는 추수감사절에 칠면조를 올리는 풍습에 따라 식탁에 오를 뻔하지만 운 좋게 위기를 면하고 살아남는다.

추수감사절을 칠면조 학살의 날이라고 생각하는 레지는 칠면조 해방을 외치는 '제이크'와 함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가서 추수감사절 식탁에 칠면조를 올리는 풍습을 없애려 한다(우리나라로 치면 복날 희생되는 '닭'들의 반격이라고 할까). 타임머신을 타고 1961년 첫 번째 추수감사절이 있던 해에 도착한 이들은 좌충우돌 끝에 추수감사절 식탁에 칠면조가 올라가는 걸 막아낸다.

하지만 문제는 칠면조 요리를 대신해서 식탁에 올라갈 만한 음식이 있어야 된다는 것! 레지는 다시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가서 칠면조를 대신할 음식을 가져온다. 그 음식이 뭐냐고? 바로 '피자'다. 난 의미심장한 결말에 웃었다. 하긴 미국뿐이랴. 우리도 명절에 모이면 마지막 즈음엔 피자 한 판으로 마무리되는 일이 흔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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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나라 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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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자'는 여러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의 단골 메뉴다. 많은 사람들의 입맛에 맞고 조각으로 나눠 여럿이 먹기도 좋고, 손으로 들고 먹기도 편하다. 원래 이탈리아의 음식이던 피자는 제2차 세계 대전 후 유럽에 파병 나갔던 군인들을 통해 미국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는 미국을 통해 피자가 들어왔기 때문에 이탈리아 피자보다는 미국식 프랜차이즈 피자가 주를 이룬다.

하지만 피자가 이탈리아의 음식이라는 건 누구나 안다. 그중에서도 나폴리 피자는 유명하다. 나폴리 여행을 계획했을 때 제대로 된 이탈리아 피자를 먹어보겠다는 계획은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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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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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에 도착했을 때는 깜깜한 밤이었다. 이탈리아 남부의 치안이 안 좋다는 얘기를 익히 들어온 데다 몇몇 사람은 내게 나폴리 괴담을 들려준 탓에 긴장했지만, 걱정이 무색할 만큼 여행은 순조로웠다. 그저 짧은 일정이 아쉬울 뿐이었다. 나폴리의 상징 중 하나인 거리에 빨래를 널어 놓은 풍경도 좋았고 거리는 예상대로 지저분했지만 불쾌할 정도는 아니었다. 사람이 사는 풍경이 좀 지저분하면 또 어떠랴. 난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나폴리 피자를 찾아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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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 거리의 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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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피자장인협회(AP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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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에서 먹는 모든 피자가 나폴리 피자이긴 하지만 진정한 '나폴리 피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몇 가지 기준이 있다. 2004년 나폴리 피자장인협회가 EU로부터 전통 특산물 인증(STG) 마크를 획득한 제조 방법으로 만들었느냐 아니냐를 구별하는 것이다. 이 기준에 따르면 진정한 나폴리 피자는 '반죽을 밀 때는 기계가 아닌 사람 손으로 만진다' '도는 가운데서부터 손으로 눌러 펴고 가장자리 부분의 폭은 2㎝를 넘지 말아야 한다' '485도의 장작 화덕 안에 넣어 굽는다' 등의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심지어 장작을 써야 하는 기준 때문에 몇 년 전엔 어느 피자집 주인이 화덕에 넣을 장작이 부족해서 공동묘지에서 관을 꺼내 그 나무를 불쏘시개로 쓴 황당한 사건까지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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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 거리의 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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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까다로운 기준 탓에 나폴리의 모든 피자집이 이를 지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진정한 나폴리 피자를 맛보고 싶다면 인증 마크가 있는 가게를 찾아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국내 여행객들에게 사랑받는 '나폴리 3대 피자 맛집'이 있는데 '디 마테오' '브랜디' '다 미켈레'가 그에 속한다(이건 정해진 게 아니니 '5대 맛집'도 있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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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 피자 가게 '디마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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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다 미켈레'는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 나와서 더 유명해졌다. 이 피자 가게는 마르게리타 피자로 유명하다. 마르게리타 피자는 토마토, 바질, 모차렐라로 만들어진 피자로 나폴리에 놀러온 이탈리아 왕비 마르게리타가 그 맛을 보고 반해 그녀의 이름을 붙인 것이라 전해진다. 토핑으로 올려진 토마토, 바질, 모차렐라는 빨간색, 초록색, 흰색으로 이뤄져 있어서 이탈리아의 국기를 상징하기도 한다.

난 나폴리의 거리를 걷다가 나폴리 피자 인증을 받은 한 피자집에 들어갔다. 앞서 얘기한 피자 가게 중 한 곳을 가려 했지만, 어느 곳은 휴무였고 어느 곳은 사정상 오후부터 영업을 한다고 했으며 또 어느 곳은 찾아가기엔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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뇨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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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 거리의 깔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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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들어간 피자 가게엔 흥이 많은 웨이터가 기다리고 있었다. 난 마르게리타 피자와 뇨키, 칼조네를 주문했고 조금 기다리니 메뉴가 나왔다. 뇨키는 부드러우면서도 입안에 찰싹 붙는 식감이 좋았고 칼조네는 간이 센 듯했지만 맛있었다. 스모키한 향을 풍기는 약간 탄 듯한 피자는 쫀득하게 씹히는 도에 입안에서 상쾌하게 퍼지는 토마토 향까지 훌륭한 맛이었다. 밀가루와 물, 소금, 이스트를 넣어 도를 만들고 토마토와 양파, 바질을 넣어 뭉근히 끓여 소스를 만들고 장작불을 피워 정성껏 구워낸 그 시간들이 피자에서 느껴졌다. 내가 한국에서 먹던 피자가 '패스트푸드'라면 나폴리에서 먹는 피자는 '슬로푸드'에 가까울 것이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음식을 먹으며 '나폴리 피자는 어디서 먹어도 맛있네!'라고 생각할 즈음 웨이터가 흥이 나서 리듬을 타며 서빙하기 시작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내 옷을 잡아당겼다. 아. 난 이런 거 너무 쑥스러운데. 내가 일어설까 말까 망설이는 순간, 고맙게도 내 옆에 있던 외국인이 먼저 일어나 웨이터와 함께 리듬을 타기 시작한다. 그들을 보고 있으니 영화 '먹고 마시고 기도하라'가 다시 떠올랐다. 삶에 지쳐서 떠났던 줄리아 로버츠가 '먹기' 위해 도착한 곳이 이탈리아 나폴리다. 영화의 대사처럼 '달콤한 게으름'을 느낄 수 있는 곳. 먹고 있던 피자가 더 맛있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정영선 요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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