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와 안개가 퍼붓던 제주 산간에서 말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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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이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오랜만에 찾은 제주는 첫인사를 꽤 거칠게 했다. 한여름 장맛비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폭우가 내리는 동시에 바람마저 매섭게 몰아쳤다. 돌풍 때문에 비행기가 한 차례 활주로 상공을 돌기까지 했다. 우여곡절 끝에 바퀴가 땅에 닫자 여기저기서 박수를 쳐 댈 정도였다. 하지만 공항 밖을 이미 비행기 차창 너머로 확인한 상황. 그냥 공항 안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아버렸다. 그래도 나가야 했다. 사선으로 비가 내리다시피 하니 우산을 펼 필요가 없었다. 물에 약한 카메라를 가슴에 품고 잰걸음으로 렌터카 업체 셔틀에 겨우 올라탔다. 그렇게 4월의 제주와 마주했다.
"하~, 어쩌란 말인가."
렌터카 인도를 기다리면서도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냥 비가 아닌 폭우 속에서 취재할 거리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뭔가 안절부절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렌터카 업체 직원이 몇 곳을 추천했다. "날씨와 상관없이 가면 좋은 곳이 있어요. 숲."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물었다. 그래도 같은 답이다. "숲이요." 들이붓는 비를 맞으며 숲을 거닐라는 것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제주 토박이라는 그는 자신을 믿어보라며 내 손에 열쇠를 쥐어줬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를 가든 마찬가지일 테니 말이다.
"가즈아~!"
비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니 빗방울은 갈수록 더 굵어졌다. 이럴 때 운전은 첫째도 둘째도 안전뿐이다. 감속 운행은 기본이고, 비상등 역시 필수다. 빗줄기가 센 것도 있지만 안개까지 동반할 때가 많아 안전운전만이 살 길이다. 느릿느릿 한참을 한라산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뿌연 안개를 뚫고 서서히 푸르름이 눈에 들어왔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은 올곧은 삼나무가 셀 수 없이 무리를 지어 있다. 절물자연휴양림이다. 산책로마저 정갈하다. 심지어 티끌 하나 없는 느낌이다. 발자국 하나 잘못 남기면 안 될 것 같은 청정함이 보는 내내 압도감을 전했다. 숲 안으로 들어갈수록 쉴 새 없이 얼굴에 떨어지던 빗물이 닦아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워낙 빽빽하게 군락을 이루고 있어 나뭇잎이 우산을 펴 준 느낌이랄까. 가는 내내 '우두두둑' 빗소리가 나무와 나무 사이를 가르는 바람 소리와 어우러져 마치 야외 오케스트라 연주를 감상하는 듯했다. 제주에 도착하며 울적해졌던 기분이 어느샌가 말끔히 사라졌다. 참으로 상쾌했다.
티끌 하나 없이 정갈한 느낌의 절물자연휴양림. [사진제공 = 제주관광공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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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엽다. 고사리 장마."
미세먼지와 스트레스에 찌든 몸과 마음을 정화하는 데는 서울에서 고작 3시간이면 충분했다. 절물자연휴양림을 떠나기가 못내 아쉬웠지만 한라산 자락으로 조금 더 들어가기로 했다. 비옷을 준비하지 못한 탓에 물에 빠진 생쥐 같았지만 그마저도 좋았다. 평소 같으면 15분 거리지만 빗길이라 두 배 가까이 걸려 도착한 곳은 사려니 숲길. 이미 길 양쪽과 주차장에 차량 서너 대가 서 있었다. 이 비를 뚫고 여기까지 왔다면 분명 내가 지금 느끼는 그 '청량함'을 알고 찾아온 이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려니 숲길은 절물자연휴양림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더 '날것' 같다고 할까. 야생의 기운이 좀 더 다가왔다. 숲길도 절물의 나무데크가 아닌 흙바닥인 것이 그랬고, 걷는 동선도 짜여졌다기보다 자연의 흐름을 따른 듯 보였다. 그래서일까. 숲길 안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마치 동화나 영화 속 깊은 숲에 사는 요정이나 기인을 만나러 가는 상상을 하게 된다. 얼마나 들어갔을까. 맞은편에서 한 무리가 인사를 건네왔다. 비옷도 입지 않은 채 홀로 걷고 있는 내 모습이 의외로 보인 듯했다. 제주에 터를 잡고 산 지 7년차라는 그는 보온병에 담긴 커피 한잔을 권했다. "고사리 장마라고 해요. 4월 중순이나 말에 오늘처럼 세차게 비가 내리죠. 그래야 고사리가 잘 자란다고 하더라고요." 부르는 이름이 꽤 귀엽고 예뻤다. '고사리 장마'. 그랬다. 역시나 장마였다. 봄비가 이렇게 사나울 리 없다. 향 좋은 커피와 귀한 정보를 준 이름 모를 분을 만나 마음도 훈훈해졌다.
"유레카!"
또 느꼈다. 역시 제주는 알면 알수록 매력이 철철 넘친다는 것을. 아니, 제주에 올 때마다 매번 느낀다. 제주는 쉽사리 곁을 주지 않는다. 마냥 애끓는 짝사랑을 하게 한다. 그래서 또 오게 한다. 비 오는 제주에서 무얼 하냐고? 단연코 한 번쯤은 두려움일랑 던져버리고 숲에 가보길 추천한다. 물론 난 다음에 다른 곳을 또 찾아 나설 테지만.
[제주 = 장주영 여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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