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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모피아의 시대는 저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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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관료는 논란 피하는 무난한 선택”

문재인 대통령 페북에 글 올려

경제정책 라인에 모피아 없어

새 금감원장도 교수 출신 임명

“모피아 곱게 안 본다” 해석 나와

개발경제 시절, ‘돈줄’ 쥔 모피아

20대 사무관이 50대 임원에게 호령

경제발전으로 돈 넘치자 힘 빠져

이명박·박근혜 정부 거치며 쇠락

“경제위기 시 다시 등용” 시각도



[토요판] 뉴스분석 왜

문재인 정부와 모피아

▶ 지난달 말 문재인 정부의 세번째 금융감독원장에 윤석헌 서울대 경영대 교수가 임명됐다. 현 정부 출범 1년 만에 금감원장이 세번이나 바뀐 사실도 이례적이지만, 세명 모두 금융관료 출신이 아니라는 점도 눈에 띈다. 문재인 정부가 모피아를 곱게 보지 않는다는 말이 흘러나온다. 한때 최고의 위세를 자랑했던 모피아의 시대는 정말 저문 것일까. 모피아의 역사와 한국 경제 변화에 따른 쇠락을 살펴보았다.

한겨레

교수 출신인 윤석헌 신임 금융감독원장이 지난 8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금융감독원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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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을 피하는 무난한 선택이 있을 것입니다. 주로 해당 분야의 관료 출신 등을 임명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한 분야는 과감한 외부 발탁으로 충격을 주어야 한다는 욕심이 생깁니다.”

지난달 13일 문재인 대통령은 페이스북 본인 계정에 이런 글을 올렸다. 당시 김기식 금융감독원장이 과거 의원 시절 ‘부적절한 출장’ 논란으로 사퇴 압력이 높아지던 때였다. 문 대통령은 이 글을 올린 지 20일 정도 지난 5월4일 김 원장 후임에 윤석헌 서울대 경영대 교수를 임명했다.

현 정부 들어 임명된 금감원장 3명(최흥식·김기식·윤석헌)이 모두 비금융관료 출신이다. 김기식 전 원장은 시민단체인 참여연대에서 활동하다 국회의원을 지냈고, 최흥식 전 원장은 연세대 교수를 거쳐 하나금융지주 사장으로 재직했다. 1999년 금감원이 출범한 이후 박근혜 정부까지 10명의 금감원장은 모두 경제관료, 특히 재무부 이재국 출신이었다. 관가에서 문 대통령이 정통 금융관료, 소위 ‘모피아’(재무부+마피아)를 곱게 보지 않는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실제 현 정부에서 금융관료의 입지는 매우 좁다. 인사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금감원장뿐만 아니라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김동연)과 기재부 1·2차관(고형권·김용진) 모두 금융관료와 대칭을 이루는 예산 관료(경제기획원 출신)들이 차지했다. 청와대 경제정책 라인도 마찬가지다. 정책실장(장하성), 경제수석(홍장표), 경제보좌관(김현철) 모두 교수 출신이다. 이전 정권에는 항상 있었던 ‘금융비서관’ 자리조차 사라졌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금융관료에 대한 적개심까지 종종 드러낸다. 지난해 하반기 이건희 차명계좌의 금융실명법 적용 논란 과정에서 박용진 민주당 의원은 “금융위는 삼성 앞에서만 작아지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금융위 관료들 사이에선 “어쩌다가 우리가 적폐로 몰렸는지 모르겠다”란 자조가 흘러나온다. 한때 ‘정권은 유한해도 모피아는 영원하다’란 말이 있을 정도로 위세를 떨쳤던 모피아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

모피아는 누구

모피아는 이제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도 흔하게 쓰이는 단어가 됐지만, 정작 ‘모피아’가 지칭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는 명확하지가 않다. 엄격한 정의 아래 쓰이기보다는 주로 미디어나 시민단체, 정치권 등이 그때그때 사안에 따라 모피아란 단어를 썼다.

모피아는 두 단어가 합쳐진 합성어다. 하나는 재무부(모프·MOF·Ministry of Finance), 또 하나는 이탈리아 범죄조직인 마피아다. 재무부는 오늘날 존재하지 않는 정부 부처다. 1948년에 출범해 1994년 12월 해체했다. ‘경제기획원’(1961~1994)과 함께 국가개발경제 시절 한국 경제를 이끈 양대 부처 중 하나다. 경제기획원이 나라 경제의 밑그림을 그렸다면 재무부는 그 속살을 챙기며, 서로 경쟁하고 갈등했다.

재무부의 명맥은 재정경제원(1994~1998), 재정경제부(1998~2008), 기획재정부(2008~현재)+금융위원회(2008~현재) 차례로 이어졌다. 기재부와 금융위의 전·현직 고위 관료는 물론, 정치권에 진출한 경제관료 상당수가 공직을 ‘재무부 사무관’에서 시작했다. 김진표(국회의원), 윤증현(전 기재부 장관), 이용섭(전 대통령직속 일자리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꼽을 수 있다.

재무부는 통화·금융·국고·조세·대외경제·국유재산 관리를 맡았다. 모피아를 어원에 충실하게 정의하면 예산과 산업정책, 공정거래·중소기업 정책을 뺀 나머지 대부분의 경제관료들이 모피아에 속하게 된다.

관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모피아 범주는 사뭇 다르다. 이들에게 모피아 ‘핵심’ 혹은 ‘적장자’는 재무부 이재국 국장 또는 이재과장 출신이다. 이재국장 또는 이재과장은 재무부 후신인 재경원과 재경부, 금융위에서는 금융정책국장 혹은 금융정책과장이다. 모피아 안에도 남다른 응집력과 결속력을 보였거나 보이는 그룹이 있다는 얘기다. 여기에 속하는 비교적 가까운 세대로는 김석동·임종룡(각각 전 금융위원장)·김광수(현 NH농협금융지주 회장) 등이 있다.

이들은 모피아를 정경유착, 부정부패, 금융회사 인사 농락 등과 결부시키는 세간의 부정적 시선과 달리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자부심’마저 묻어 나온다. 서열주의, 학벌주의가 팽배했던 과거 시절, 공무원 사회에서도 이재국(혹은 금융정책국)에서 일한다는 건 남다른 의미를 가졌다. 관직 등용문인 행정고시에서 최상위권에 들어야 이재국 사무관이 됐기 때문이다. 관가에선 20여년 전만 해도 “사무관이 다 똑같은 사무관이냐”란 말이 돌아다녔다. ‘엘리트 의식’은 모피아의 정서를 이루는 핵심 요소다. 자연스럽게 배타성도 강해진다. 경기고 등 명문고를 거쳐 서울대 법대나 경제학과를 졸업한 이들이 대부분이어서 ‘동종교배’ 성격도 짙었다. 공무원 사회에서 이 그룹은 ‘견제’와 ‘질시’의 대상인 동시에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모피아 힘의 원천

과거 모피아의 위세는 대단했다. 이재국 사무관은 심심찮게 국책·시중은행장, 기업 임원들을 호출했다. 사무실에 들어온 40대 후반~50대의 금융회사 고위 임원들은 새파란 20대 후반의 사무관 눈을 바로 쳐다보지 못한 채 허리를 굽혔다. 2000년대 초반까지 시중은행장도 금융정책국장에게 면담을 요청하기 어려웠다. ‘격’이 맞지 않는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모피아는 ‘돈줄’을 쥐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해방을 맞은 한국엔 이렇다 할 만한 자본이 축적돼 있지 않았다. 일제가 남겨놓은 자산과 미국 등의 원조자금이 경제의 불쏘시개 구실을 했다. 또 다른 자금은 금융에서 왔다. 나라 곳간이 비어 있던 개발연대 시절, 사회 인프라 건설 등에 들어가는 막대한 자금은 금융에서 끌어다 쓸 수밖에 없었다.

재무부 이재국은 돈이 부족하던 시절 저리의 정책자금을 은행에 배분했고, 은행들은 이 돈을 이재국의 뜻에 맞춰 기업에 빌려줬다. 한마디로 모피아는 ‘보이는 손’이었다. ‘관치금융’이란 말도 여기에서 나왔다.

모피아의 권력은 인허가권과 재량권에도 뿌리를 두고 있다. 금융 분야는 어떤 영역보다 섬세하고 안정적으로 관리될 필요가 있는 터라 규제가 촘촘하다. 이 규제권을 모피아들이 들고 있다. 나아가 규제권의 근거가 되는 법률은 구멍이 숭숭 뚫려 있어 광범위한 재량권도 누릴 수 있었다. 금융법의 맏형 격인 은행법이 1950년에 제정될 당시 전체 조항은 고작 40여개에 불과했다. 시행령은 1983년에 이르러서야 만들어진다. 주요한 법령 해석과 규정이 대부분 모피아나 모피아 우산 아래 있던 한국은행 손에 위임돼 있었다. 모피아는 법과 제도를 만들고 고치고 운용하며 금융을 호령했다.

모피아의 힘은 금융공기업과 금융회사 인사에서 뚜렷하게 드러났다. 산업은행 등 국책금융기관은 물론 민간 은행장은 모피아 오비(OB·퇴직자) 몫이었다. 1954년 설립 이후 33명의 은행장을 배출한 산업은행의 경우 비공무원 출신 은행장은 현 이동걸 회장을 포함해 서너명에 그친다. 2000년대 초반 재경부 금융정책과 사무관을 지낸 한 인사는 “국책은행은 물론 민간금융회사까지 최고경영자(CEO)는 자리마다 3배수 후보군을 금융정책과에서 직접 관리했다”고 귀띔했다. 모피아의 ‘인사권’은 모피아의 응집력을 더욱 키우는 요소였다.

‘좋은 시절’은 가고

모피아의 위세는 사실 문재인 정부 이전부터 기울고 있었다. 현 정부 들어 갑자기 나타난 현상은 아니다. 모피아의 쇠락은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모피아에 대해 특별한 언급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명박 정부에서 모피아들은 요직을 꿰차지 못했다. 시중에선 이 전 대통령이 현대건설 사장 등 산업계에 몸을 담았을 때 금융관료들을 상대하면서 모피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가졌고, 그런 인식이 ‘금융 홀대론’으로 나타났다는 분석이 떠돌았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삼성 등 산업자본이 귀하게 대접을 받았다.

실제 2008년 정권 출범 첫해 이 전 대통령은 모피아가 양보할 수 없는 자리인 금융위원장과 부위원장에 민간인 출신(전광우·이창용)을 앉혔다. 산은금융지주(현 산업은행) 회장에도 외국계 금융기업 출신(민유성)을 임명했다. 모피아들이 쥐락펴락하던 민간 금융회사도 마찬가지였다. 케이비(어윤대)·신한(라응찬)·하나(김승유)·우리(이팔성) 등 4대 금융지주 회장은 모두 이 전 대통령과 친분이 두터운 민간 인사들이었다. ‘정피아’(정치권을 배경으로 내려온 낙하산)란 신조어가 등장했고 모피아는 몸을 사렸다. 그나마 이명박 정부 때 모피아가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건 2008년 금융위기 덕분(?)이었다. 이 전 대통령은 금융위기가 불거지고 나서야 금융위원장에 모피아 출신(진동수·김석동)을 차례로 등용한다.

이런 흐름은 박근혜 정부 때도 이어졌다. 청와대 경제수석이나 정책조정수석은 박근혜 정부 내내 비관료 출신(안종범·강석훈)이 맡았다.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학자 출신(현오석)이거나 정치인(최경환·유일호)에게 돌아갔다. 산은 총재 자리에도 교수 출신(홍기택)과 민간금융인(이동걸·전 신한금융투자 대표)을 앉혔다. 특히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 후 ‘관피아’ 논란이 불거지고 공직자 재취업 규제가 대폭 강화되면서 퇴직 뒤 자리를 잡지 못한 모피아들이 하나둘씩 생겨났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금감원장 인사에서 보듯 ‘모피아 홀대’는 기정사실로 자리잡았다. 이런 변화가 단순히 정권의 ‘취향’이나 호불호에 따른 것일까. 다양한 설명이 가능하지만, 근본 원인으로는 달라진 한국 경제 환경을 빼놓을 수 없다. 2000년대 들어 한국 경제는 모피아 힘의 원천이었던 ‘신용할당형 경제’에서 벗어났다. 가난한 나라에 돈을 빌려줄 정도로 자금이 풍부해졌다. 삼성전자, 현대차와 같은 글로벌 기업 곳간에는 은행 돈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자금이 가득 차 있다. 오히려 오늘날 금융의 문제는 돈이 없어서 못 쓰는 게 아니라 돈이 많아도 쓰이지를 않는 것이다. ‘보이는 손’이 서 있던 기반이 허물어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최근 비등한 모피아에 대한 비판은 이미 힘이 빠진 호랑이를 공격하는 듯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금융의 고유한 특성은 모피아의 존재감을 약화시킬지언정 소멸시키지는 않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모피아 핵심 그룹 끝자락에 있는 한 50대 초반의 금융관료는 “경제위기 땐 또다시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는 게 모피아의 운명”이라고 말했다. 전문성과 경험으로 단련된 노하우를 금융시장이 여전히 필요로 하는데다, 특히 우리 사회는 경제에 위기가 닥쳤을 때 ‘소방수’로, 난마처럼 얽힌 산업 구조조정의 매듭을 풀어야 할 때 ‘해결사’로 모피아를 찾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 모피아 비판론자인 전성인 홍익대 교수는 ‘편법과 꼼수 세상의 지배자, 모피아’란 제목의 논문(2013)에서 이런 말을 했다.

“어느 나라나 금융업에는 일종의 비밀스러운 끈적거림이 있다.…. 금융업은 줄기차게 비밀과 공개 사이에 줄타기를 한다. 모피아를 약화시키고 또다른 모피아 출현을 막기 위해선 사회가 균형 잡힌 시각으로 이 줄타기를 통제해야 한다. 모든 것을 공개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비밀 지상주의만을 내세울 수도 없다.” 김경락 기자 sp9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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