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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지위’를 이용해 ‘성적 결정권’ 뺏는 것, 불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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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뉴스분석 왜?

안희정 사건과 ‘업무상 위력 간음죄’

안희정 전 지사 사건에 적용된

형법상 ‘업무상 위력 간음죄’

‘위력’이란 “자유의사 제압하는

경제적·정치적인 지위나 권세”

피해자 쪽 “생사여탈권 가졌다”

안 쪽 “지위로 위력 행사 안해”

법조계 등 전문가들도 의견 갈려

‘위력’ 기준 세우는 계기 될 듯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자신의 비서를 성폭력한 혐의를 받고 있는 사건에서 안 전 지사는 비서에게 폭행이나 협박을 사용하지 않았다. 안 전 지사는 이를 근거로 “합의에 의한 관계”라고 주장하고 있고, 피해자는 안 전 지사가 자신의 지위나 권세를 이용했다고 맞서고 있다. 안 전 지사에게 적용된 혐의는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죄’다. 단어도 생소한 이 ‘위력’의 해석에 이번 사건 향방이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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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의 경선 캠프에 오기 전 계약직 공무원으로 일했고 상사의 평가에 의존해 계약이 연장되는 불안정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치권에 오면서 꼬리표가 얼마나 중요하고, 이력서나 경력이 아닌 평판조회가 앞으로 일을 계속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거의 유일한 기준이라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습니다. (중략) 처음부터 끝까지 (피고인은) 지사님이었고 제가 모시는 상사였을 뿐입니다. 피해를 당할 당시에도 저는 제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거절을 표현했습니다.”(피해자 최후진술)

“어떻게 지위를 갖고 한 사람의 인권을 뺏을 수 있겠습니까. 지위를 갖고 위력을 행사한 적 없습니다.”(안희정 최후진술)

지난달 27일 오전 서울서부지방법원 303호에서 열린 결심 공판에서 피고인과 피해자는 ‘위력’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놓고 상반된 주장을 했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에게 적용된 혐의는 형법 297조의 ‘강간죄’가 아닌 형법 303조의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죄’였기 때문이다.

검사는 징역 4년을 구형하면서 “정치 조직은 다른 조직과 다른 특성이 있다. 권력을 정점으로 강한 위계질서가 작동한다. 최고 권력자의 의사에 따라 피해자의 운명이 결정되고 직업 공무원과 달리 피해자가 별정직 공무원이었던 특수한 맥락도 있다”고 말했다. 안 전 지사쪽 변호인단은 “차기 유력 대선 후보라는 인지도가 곧 간음죄의 ‘위력’과 이어진다고 볼 수는 없고, 피해자의 피해 감정과 그 이후의 행동도 불일치한다”고 맞섰다.

강간죄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상대를 제압해 성관계했을 때 적용된다.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은 한 조직 내의 권력관계, ‘위력’으로 원치 않은 성관계를 했을 경우 적용된다. 대법원은 1998년, 위력에 의한 업무방해죄에 관한 판결에서 “‘위력’이란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하기에 충분한 세력을 말하고, 유형적이든 무형적이든 묻지 않으므로 폭행·협박뿐 아니라 사회적·경제적·정치적인 지위나 권세를 이용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판결했다.

안 전 지사의 ‘위력’은 인정될까. 여성계에서는 이번 판결이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에서의 ‘위력’을 해석하는 기준을 세우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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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력 인정은 미성년자·장애인 대부분

지금까지 위력에 의한 간음 혐의가 적용돼 유죄 판결이 난 경우는 피해자가 미성년자거나 장애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2013년, 연예기획사 대표 장아무개씨는 미성년자 2명을 포함한 자신의 소속사 연예인 지망생 4명을 간음·추행한 혐의로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법원은 “피해자들이 소속사 대표와 사이가 나빠지면 다른 연예기획사에도 가지 못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대항할 수 없었다고 진술했고, 피고인은 18세인 피해자들보다 약 30년 이상 연상이고 피해자들과 성적 접촉을 할 정도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연예기획사 대표로서의 지위나 권세를 이용했다”고 판결했다. 뇌병변 1급 장애인인 피해자를 차 안에서 간음한 사건에서도 2014년, 법원은 “차량 안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욕설을 하며 피해의 머리를 눌렀다면, 신체적·정신적인 장애를 가진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상당한 압박감을 느낀 것으로 보이고, 이는 ‘위력’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고 판결했다.

이처럼 법원은 위력을 판단하면서 저항하기 어려운 장소, 피해자와 가해자의 나이·신체적 차이, 피해자의 공포감 등을 기준으로 삼았다. 피해자가 성인일 경우에는 위력이 있었는지 여부를 엄격하게 해석한다. 안 전 지사 쪽 변호인단이 첫 준비공판기일에서 “(김 전 비서는) 아동이나 장애인이 아니고 혼인 경험이 있는 학벌 좋은 여성으로서 안정적인 공무원 자리를 버리고 무보수 자원봉사로 일할 정도로 주체적이고 결단력 있는 여성이다. 성적 자기결정권이 제한된 상황에 있었다고 보는 건 맞지 않는다”고 말한 것도 이런 법원의 태도를 겨냥한 것이다.

성인에 대한 ‘업무상 위력 간음죄’ 판례는 많지 않다. 헬프미 법률사무소의 이상민 변호사는 “위력에 의한 간음인 경우엔, 피해자가 피해사실을 진술하기가 어렵다. 강간은 폭행이나 협박 등 의사를 제압하는 행위가 수반되기 때문에 원하지 않았던 성관계라는 걸 이야기하기가 상대적으로 쉽다. 업무상 위력 간음죄는 업무상 상하관계가 수반되고, 폭행이나 협박이 없어 피의자·피고인 쪽에서도 화간이라고 주장할 여지도 많기 때문에 피해자 측에서 사실을 말하기 어려워한다. 그래서 판례 자체가 별로 없다”고 말했다.

업무상 위력 간음 혐의가 적용된 가해자는 ‘합의된 성관계’였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수사기관과 법원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전부터의 관계, 두 사람 사이에 평소 나누었던 대화, 문자메시지 내용, 거부의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했는지를 중요한 증거로 판단한다.

전북 전주에서 일하던 20대 여성 ㄱ씨는 2013년 10월 자신의 회사 사장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사장은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피감독자 간음)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지만, 1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당시 재판부는 ㄱ씨가 사건 당시 입고 있던 스키니진을 두고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 강제로 벗기기 쉽지 않았을 것”이라며 사장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사장이 ㄱ씨에게 보낸 문자메시지가 판결을 뒤집었다. 2심 재판부는 2016년 10월, 유죄 판결을 내렸다. 사장이 보낸 문자메시지에는 “안정 잘 취해라. 못난 놈이 부탁한다. 무릎 꿇고 사죄할 기회 좀 주라” 등 사죄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재판부는 “(사죄 문자를 보낸 것은) 합의 하에 성관계를 한 사람의 태도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반면 수습 여직원이 직장 내 남자 과장을 고소한 사건에서는 평소 연인관계처럼 보이는 문자메시지를 수차례 주고받았고 함께 팔짱을 끼고 사진을 찍거나 여행을 했다는 이유로 두 사람의 성관계가 위력에 의한 간음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무혐의 처분을 했다.

대법원 판례를 살펴보면, 대법원은 1976년, 자신의 처가 경영하는 미장원에 고용된 직원을 간음한 경우에도 사실상의 보호·감독관계가 있다고 인정해 업무상 위력 간음죄를 인정했다. 재판부는 “종업원인 피해자에게 저녁을 사준다는 구실로 데리고 나와 피해자가 서울 지리에 생소함을 이용해 야간 통행 금지 시간까지 고의로 시간을 지켰고, 여관으로 유인해 위력으로 간음한 점을 보면, 피해자 스스로의 승낙에 이루어진 성관계라고 보기엔 경험칙상 어렵다”고 판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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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의 위력 인정될까

안 전 지사의 ‘위력’은 인정될까. 안 전 지사의 정치적 지위나 업무상 인사권만으로는 위력이 있었다고 단정하긴 어렵다. 그로 인해 상대방의 의사를 제압하는 행위가 있어야 한다. 수사기관이나 법원도 이를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대법원은 2005년 판결에서 “위력으로써 간음했는지 여부는 행사한 유형력의 내용과 정도, 가해자의 지위나 권세의 종류, 피해자의 연령,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전부터의 관계, 범행 당시의 정황 등 제반 사정을 종합해 판단해야 한다”고 그 기준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각 사실관계에서 이 기준이 어떻게 적용돼 죄가 성립되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다.

한 검사는 “기습적으로 이뤄지는 추행과 달리 간음의 경우엔 피해자가 일정 부분 이에 응하는 형태의 모습을 띄게 되다 보니 피해자의 진의를 알기 어려운 게 현실”이라며 “가해자가 합의에 의한 애정관계였다는 취지로 제출하는 카카오톡, 문자, 통화 내용, 사진이 증거 자료는 되지만 피해자의 진의는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다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법무법인 강호의 박종명 변호사는 “위력이란 결국 폭행이나 협박 없이도 피해자의 마음을 꼼짝 못하게 묶어두는 것이다. 업무상 위력 간음죄와 강간죄는 다른 것인데도 수사기관에선 똑같이 조사한다. 위력 자체, 권력관계가 있었는지를 조사하는게 아니라 피해자에게 위력을 어떻게 느꼈는지 입증하라고 한다”고 말했다. 그는 “사실상 평등하지 않은 관계인데 평등을 전제로 질문한다. 특별한 예외가 없으면, 도지사와 비서라는 관계에선 위력을 행사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상민 변호사는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죄에서 위력을 판단할 때는 결국 진술증거에 의존할 수 밖에 없고 진술의 일관성이 그 기준이 된다”며 “피해자의 진술이 일관되기 때문에 안 전 지사에게 유죄가 선고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익명을 요구한 한 변호사는 “안 전 지사에게 도덕적·윤리적 책임이 있는 것은 명백하나 법적으로 위력에 의한 간음죄가 성립하는지는 의문”이라며 “자신보다 지위가 높고 권세를 이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고 해도 4차례 모두 위력을 행사했다고 보긴 어려워서 무죄 판결이 나올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도 “자신의 우위적인 업무상 지위를 이용하려는 의사를 표현하거나 상대방이 자신의 지위 때문에 이에 응한다는 등의 사정이 없는 상태에서 단순히 객관적으로 업무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관계에 있었다는 사정만으로 업무상 위력을 행사했다고 보긴 어렵다”고 말했다.

여성계에서는 ‘위력’을 보다 넓게 해석해주길 제안하고 있다. 권김현영 여성주의 연구활동가는 “감독자가 피감독자의 생사여탈권을 쥔 상황에서는, (강간죄 성립 요건인) 폭행이나 협박을 하지 않고 단순히 성적인 접촉 혹은 제안하는 것만으로도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다.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은 가장 전형적인 권력형 성폭력”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도지사가 비서에게 성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부적절한 처신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지, 데이트 관계로 생각할 수 있는 증거도 없는 상황이었는데 자신이 취한 행동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비서는 자신의 말을 거절할 수 없거나 좋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인지 등을 질문하며 안 전 지사의 행동이 어떤 논리적 정합성을 가질 수 있는지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혜겸 한국여성변호사회 이사는 “성폭력의 정의는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여 나이, 신체, 지위 등 ‘힘’의 차이를 이용해 상대방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를 말한다”며 “법원은 피해자가 성인일 경우는 성적 자기결정권의 행사가 비교적 자유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위력 등에 의한 간음을 잘 인정하진 않았지만, 실제 일상생활 속에서 과연 피해자들이 지위상의 차이가 있는 사람들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번 사건의 1심 재판 선고일은 오는 14일 예정돼있다.

신지민 기자 godji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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