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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목까지는 시원하고 좋았다. 무릎까지 물에 잠기니 느낌이 확 달라졌다. 관절 마디마디가 쑤시고 아릴 정도로 차가웠다. ‘그냥 돌아나갈까.’ 그러나 한밤에도 30도를 넘는 초열대야의 서울을 떠올렸다. 눈을 질끈 감고 호수에 풍덩 빠져들었다. 온몸에 저릿하게 한기가 돌았다. 올해 피서는 이걸로 됐다 싶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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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바이칼 호수는 한여름에도 평균 수온이 3~4도 정도다. 입수하면 냉장고 속에 들어가 있는 것과 다름없다. 동토의 기운이 응축된 바이칼을 제대로 느껴보기 위해 알혼섬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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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혼섬은 바이칼에서 제일 큰 섬이고 유일하게 사람이 사는 섬이기도 하다. 가장 가까운 도시 이르쿠츠크에서도 차로 3시간 넘게 달려야 닿을 수 있다. 멀고 광막한 그곳은 예로부터 정치범들이 쫓겨가는 유배지였다. 지금은 문명과 단절된 휴식처를 찾는 여행객들이 스스로 유배를 떠나는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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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혼섬은 가는 길부터 아름다웠다. 끝없이 펼쳐진 시베리아 대평원은 울긋불긋 들꽃 천지였다. 멀리 소와 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풍경은 수채화 같았다. 초록 들판과 푸른 하늘, 하얀 구름이 어우러진 풍경은 꼭 윈도 바탕화면 사진을 떠올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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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의 동쪽 중간 지점쯤에서 무료로 운행하는 카페리를 타고 10여분 가면 알혼섬 선착장에 닿는다. 거기서 다시 차를 갈아타고 얕은 구릉과 초원을 40여분 달려야 인구 3000여명의 후지르 마을이 나온다. 마을은 작고 소박하다. 부랴트족 원주민들은 울타리 너머 힐끔거리는 여행객을 흔쾌히 집으로 들여 차 한잔 내줄 만큼 친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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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는 집집마다 풀어놓은 소들이 풀을 뜯으러 돌아다니는 틈에 껴 구석구석 동네 산책을 즐기고, 저녁 나절이면 언덕배기에 앉아 지는 노을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게 이 섬에서 여행객들이 보내는 일상이다. 물론 전망 좋은 곳에 가면 텐트 치고 야영하는 사람도 많고 물가에는 카약이나 패들보딩을 즐기는 이들의 웃음소리도 왁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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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해도 좋지만 사실 알혼섬을 가장 잘 즐기는 방법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느릿느릿 흘러가는 시간을 낭비하며 망중한을 즐기는 것, 모두에게 필요하지만 아무도 선뜻 하지 못하는 일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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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유자적한 시간도 지겹게 느껴질 때쯤이면 러시아 군용트럭을 개조한 관광용 차량 ‘우아직’을 타고 섬 북부를 일주하는 투어 프로그램에 참여해볼 만하다. 울퉁불퉁하고 거친 숲길을 달리다 보면 꼭 롤러코스터를 탄 듯 비명이 새어나오지만 곧 창밖으로 펼쳐지는 대자연의 비경에 집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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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최북단의 하보이곶은 현지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장소다. 바이칼의 샤먼들은 이곳에서 신과 대화를 시도한다고 한다. 하보이는 부랴트족 말로 송곳니란 뜻이다. 그 말대로 날카롭게 튀어나온 지형은 깎아지른 절벽과 기암괴석으로 뒤덮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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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 끝에는 오색 천을 매단 나무가 서 있다. 저마다 천을 가져와 매달고 소원을 비는 ‘세르게’라는 신목이다. 사람들이 기도를 하며 제물로 바친 동전과 곡식이 바닥에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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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게 옆에 서서 내다보니 망망대해다. 실제로 부랴트족 원주민들은 오래전부터 바이칼을 바다라고 불러왔다. 경상남·북도를 합한 크기에 깊은 곳은 수심이 1600m가 넘으니 바다라고 해도 믿지 않을 도리가 없다. 갯바위엔 네르파라고 불리는 물개들이 둥지를 틀고 하늘엔 갈매기 떼가 날아다니는 풍경 역시 영락없는 바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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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로 돌아오는 길엔 트레킹을 즐겼다. 마을만 벗어나도 알혼섬 대부분의 지역은 휴대전화가 무용지물이다. 울창한 타이가(침엽수림) 안을 걸으며 숲이 만들어내는 소리와 냄새에 집중하다 보면 스마트폰이라는 족쇄도 금세 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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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골똘히 생각에 잠겨 걷다 보니 어느새 숲은 들판으로 변하고 길은 다시 호숫가 백사장으로 이어진다. 온몸이 기분 좋게 땀으로 젖어갈 때쯤 후두둑 하늘에서 비가 떨어졌다. 늘 날카롭고 신경질적이던 도시 생활자는 어느새 머리칼을 적시는 빗방울에도 감사하는 순한 양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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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일 걸으며 쌓인 피로는 러시아 전통 사우나 ‘바냐’에서 풀었다. 통나무로 만든 욕탕 안에 들어가자 한쪽에 자작나무를 때 달군 돌무더기가 보였다. 그 위에 물을 뿌리자 순식간에 뜨거운 증기가 올라오며 내부가 후끈해졌다. 온몸에서 땀이 비오듯 흘렀다. 미리 설명 들은 대로 자작나무 가지를 묶어 빗자루처럼 만든 ‘베닉’으로 등과 어깨를 따라 몸을 두드렸다. 얕은 신음소리가 절로 터져나왔다. 자작나무 특유의 향이 은은히 퍼졌다. 잎사귀 몇 개는 몸에 그대로 달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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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못 견디겠다 싶을 때쯤 사우나 안의 온도계를 보니 숫자 90을 가리키고 있었다. 처음엔 ‘섭씨가 아니라 화씨 온도계를 사용하나’ 생각했다. 아니었다. 한껏 달궈진 몸은 사우나 출입문 바로 앞에 준비한 냉탕에서 식혔다. 어른 가슴 높이까지 채워둔 물은 바이칼 호수 물을 그대로 담은 듯 뼛속까지 시렸다. 한겨울엔 바냐에서 몸을 달군 뒤 얼어붙은 눈밭에 뒹굴거나 아예 호수의 얼음을 깨고 들어간다고 한다. 그렇게 몸을 덥히고 식히고 여러 차례 반복하다 보면 한 해 동안 잔병치레 없이 건강하게 지낼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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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냐 체험을 마치고 나오니 일행들이 숙소 앞 백사장에 모닥불을 피웠다. 장작더미 안에는 포일로 싼 감자와 고구마도 몇 개 던져넣었다. 강바람을 안주 삼아 보드카를 한두 잔 홀짝이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밤하늘엔 국자 모양의 북두칠성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 옆으로 유난히 밝게 빛나는 북극성과 W 모양의 카시오페이아도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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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잔 보드카를 들이켜는 순간 서쪽 하늘로 별똥별이 떨어졌다. 바람이 세지며 호숫가에 부딪는 파도 소리가 점점 커졌다. 멀리 산맥과 구름이 달빛에 긴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2500만년 전 호수가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매일처럼 반복돼왔을 그 풍경 속에서, 나도 그 영겁의 시간 속 일부가 되어가고 있다는 로맨틱한 감정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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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만 해도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던 알혼섬은 최근 많이 달라졌다. 후지르 마을에 고급숙소가 잇따라 들어서는 등 개발 바람이 불고 있고, 3~4년 전부터 중국인 중심으로 단체관광객들이 크게 늘며 환경도 눈에 띄게 나빠졌다. ‘새벽녘 아무도 없는 호수에서 벌거벗고 수영을 했다’는 예전의 무용담 같은 건 이제 불가능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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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거대한 호수와 섬은 일상에 지친 여행객들을 여전히 넉넉히 품어내고 있었다. 섬에서 나오는 길에 갈매기 한 마리가 마치 배웅이라도 하듯 뱃전을 스치며 날다 부드럽게 호수에 내려앉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일행 중 누군가가 아련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태어나면 바이칼의 갈매기로 태어나고 싶어.”
<알혼섬(러시아) | 글·사진 김형규 기자 fideli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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