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17 (일)

홍천 가을 숲을 걷다, 내린천 소리에 잠들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강원도 살둔마을 ‘나홀로 캠핑’

가볍게 떠나 1박 2일 여유 만끽

삼겹살 대신 간편식 해먹고

물소리·불 때는 소리에 빠져

단풍 명소 문암골 트레킹도

올 가을은 각별하다. 넌더리나는 더위를 겨우 건너왔는데, 다가올 겨울은 기록적인 추위가 기다린단다. 단풍놀이도 각별해야 할 것 같아 강원도 깊은 산골로 텐트를 짊어지고 들어갔다. 이른바 솔캠, 혼자 즐기는 캠핑을 떠난 것이다. 이유는 단 하나.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온몸으로 가을을 만끽하고 싶었다. 출발하기 전에는 외로울까 걱정했었는데, 생애 첫 솔캠은 의외로 외롭지 않았다. 눈부신 단풍과 반짝이는 별을 벗 삼아 도리어 가슴 벅찬 시간을 보내고 왔다.

중앙일보

강원도 홍천 살둔마을 생둔 분교 캠핑장에서 아침을 맞았다. 아무도 없는 운동장에서 내린천 흐르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깊이 잠들었다가 새소리에 일어나 마주친 풍경이 따스했다. 혼자여서 적적했으나 혼자였기에 자유로운 생애 첫 ‘솔캠’이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폐교 운동장에 텐트를 치다
우선 텐트 칠 자리부터 알아봤다. 나름 생각한 조건 몇 가지가 있었다. 도시에서 적당히 떨어져 있어야 하고, 야영 공간이 넉넉하며 불을 피울 수 있는 곳. 가을이 무르익었으니 단풍도 좋아야 했다. 2주일을 물색한 끝에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는 명당을 찾았다. 강원도 홍천 살둔마을의 생둔 분교 캠핑장이었다.

중앙일보

방공방첩 표어가 걸린 옛 홍천 생둔 분교. 운동장을 캠핑장으로 쓰고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서울 출발 2시간 만에 양양고속도로 인제 IC를 통과했다. 살둔마을로 향하는 446번 지방도로 풍경은 시릴 정도로 눈부셨지만, 선글라스를 벗었다. 옥빛으로 반짝이는 내린천, 산야를 물들인 단풍을 있는 그대로 눈에 담고 싶어서였다.

마을에 도착했다. 생둔 분교 운동장 한쪽 구석에 텐트 한 동이 보였다. 살둔마을 위원회 이태호(48) 사무장에게 물었다. “저 말고 한 팀이 더 있나 봐요?” “아뇨. 저건 글램핑(장비가 필요 없는 편리한 캠핑)용 텐트입니다.” “아, 완벽히 혼자군요.” 걱정 반 기대 반이었던 조건이 갖춰졌다. 살둔마을이 언론에 여러 번 소개된 데다 도로 사정이 좋아져 캠핑도 인기인 줄 알았다. 역시 오지는 오지인가 보다.

중앙일보

홍천 살둔마을에서 문암마을로 이어지는 ‘문암골’은 눈부신 단풍을 만날 수 있는 트레킹 코스다. 인적이 뜸하고 길이 평탄해 누구나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다. 이번 주말 단풍이 절정을 이룰 것으로 전망된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해가 지기 전에 단풍놀이를 나섰다. 살둔마을 주변에 개인약수·은행나무숲 같은 단풍 명소가 여러 곳 있지만, 부러 문암골 트레킹을 선택했다. 살둔마을에서 문암마을로 이어지는 편도 6.5㎞ 임도로, 계곡을 따라 편하게 걸으며 단풍을 감상할 수 있는 인적 뜸한 길이다.

446번 도로에서 호랑소 펜션 간판을 보고 들어가면 문암골이 시작된다. 약 2㎞쯤 들어가면 비포장도로가 나오는데 이때부터 눈앞이 환해진다. 길옆 깊은 계곡에서 우렁찬 물소리가 울렸고 가까이는 오색찬란한 단풍이, 멀리는 점묘화처럼 알록달록한 가을 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중앙일보

문암골은 깊은 계곡과 암벽, 온갖 색깔의 단풍을 볼 수 있는 비밀스러운 길이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문암마을까지 다녀오려면 왕복 4시간이 넘게 걸리지만, 하늘이 어스름해져 3시간만 걷고 돌아왔다. 이번 가을 봐야 할 단풍은 다 본 것 같았다. 걷는 동안 마주친 사람은 커플 한 쌍이 전부였다.

운동장 한쪽 아름드리 벚나무 아래에 텐트를 쳤다. 가족과 캠핑을 다닐 때 늘 쓰던 3~4인용 돔 텐트가 아니라 2인용 백패킹 텐트를 빌렸다. 5분 만에 설치를 끝냈다. 평소 캠핑장에서는 다른 캠퍼에게 방해될까봐 절대 쓰지 않던 블루투스 스피커를 꺼냈다. 가을과 어울리는 조동진 음악을 들으며 느긋하게 책을 읽었다.

장작 때며 즐기는 ASMR
사방이 어둑해지니 허기가 몰려왔다. 저녁 준비에 돌입했다. 혼자인데 굳이 삼겹살을 구울 필요는 없었다. 슈퍼마켓에서 산 일회용 김·김치·즉석밥을 차렸고, 만둣국을 끓였다. 집에서 챙겨온 다시마와 멸치로 육수를 내고 냉동만두를 투척했다. 15분 만에 저녁 준비 끝. 훈련병처럼 밥을 해치웠다.

중앙일보

‘캠핑은 고기 구우러 가는 것’이란 편견을 버리자. 음식이 간소하면 한결 여유롭다. 이번엔 만둣국과 즉석밥으로 저녁을 해결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중앙일보

저녁을 간단히 먹은 뒤 모닥불에 밤과 고구마를 구워 먹었다. 이튿날에는 서울에서 사온 빵과 사과, 핸드 드립 커피로 아침상을 차렸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땅거미가 완전히 내려앉았다. 가장 기다렸던 불놀이 시간이다. 챙겨온 화로를 펼친 다음 잘 마른 잔가지와 낙엽에 불을 붙이고 오후에 마을에서 사놓은 장작을 얹었다. 타닥타닥, 타닥타닥. 금세 온기가 번졌다. 장작 타는 소리를 들으며 춤추는 불길을 보니 묘하게 차분해졌다.

요즘 유튜브에서 ASMR(자율감각 쾌락반응) 영상, 즉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영상이 유행인데 캠프파이어가 대표적이다. 3~4시간 불 때는 장면만 반복되는 영상에 사람들이 열광한다. 이날 밤 유튜브 영상과 비교할 수 없는 쾌락을 느꼈다. 오후 7시부터 장작 태우고 밤·고구마 구워 먹다 보니 금세 11시가 됐다.

중앙일보

살둔마을은 워낙 깊은 산골이어서 깊은 밤 하늘 수놓은 별을 감상하기에도 좋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가로등이 모두 꺼진 깊은 밤, 운동장 한가운데 서서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이렇게 눈부신 별을 본 적이 언제였던가. 벅찬 마음을 안고 텐트로 들어갔다. 침낭 속에 웅크리니 내린천 흐르는 소리만 희미했다.

인기척 없는 캠핑장에서 딱 한 번 섬찟했던 순간이 있었다. 별 사진을 찍고 있는데 큰 개 한 마리가 운동장을 가르며 지나갔다. 헤드랜턴에 비친 녀석의 눈빛을 본 순간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어설피 잠들었을 무렵 어떤 동물이 텐트 주변을 맴도는 느낌이 들었는데, 아까 본 그 개가 텐트 주변을 킁킁거리며 배회하는 것 같았다.

중앙일보

벚나무 아래서 잠을 자다가 문암산 줄기 너머로 떠오른 햇볕에 잠을 깼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튿날 오전 6시 즈음 눈이 떠졌다. 침낭 밖으로 얼굴을 빼니 코가 시큰했다. 기온을 확인하니 영상 1도였다. 이내 강렬한 햇볕이 내리쳤다. 텐트 지퍼를 열었다. 문암산(1146m) 줄기 너머로 해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텐트에 서리가 내릴 정도로 추운 아침이었지만, 나무와 꽃이 햇볕 받아 반짝이는 풍경은 더없이 따스했다.

마을 한 바퀴 산책한 뒤 아침상을 차렸다. 두 번째이자 마지막 끼니다. 집 근처 제과점에서 사 온 빵을 굽고 커피를 내렸다. 몇 개 남은 장작에 다시 불을 붙였다. 단출한 메뉴였지만, 모닥불 쬐며 먹는 맛은 특별했다. 혼자여서 적적했으나, 혼자였기에 누릴 수 있는 재미였다.

홍천=글·사진 최승표 기자 spchoi@joongang.co.kr

중앙일보

446번 지방도에서 내려다 본 살둔마을. 내린천 휘감는 첩첩산중에 안겨 있는 마을이다. '살둔'은 살 만한 둔덕이란 뜻이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여행정보
중앙일보

서울시청에서 홍천 살둔마을까지는 약 170㎞ 거리다. 자동차로 2시간 30분쯤 걸린다. 마을 홈페이지(saldun.invil.org)에서 야영장(1박 4만원)과 통나무 펜션(4인실 주중 10만원)을 예약할 수 있다. 야영장에서 온수와 전기를 쓸 수 있다. 장작은 사야 한다. 한 더미 1만원. 냉장고와 주방, 야전침대, 전기장판이 깔린 글램핑은 10만원이다. 모든 시설은 10월 31일까지만 운영한다.



중앙일보 '홈페이지' / '페이스북' 친구추가

이슈를 쉽게 정리해주는 '썰리'

ⓒ중앙일보(http://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